-국민 차의 한계, 고급 브랜드 필요했을까
2009년 독일 드레스덴 페이톤 공장을 찾았을 때만 해도 폭스바겐은 고급차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한 대를 완성하는데 꼬박 24시간이 걸리고, 모든 페이톤은 40㎞의 주행거리를 지닌 채 태어난다”는 공장 가이드 랄프 씨의 말이 기억난다.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을 위해 하루 생산대수는 30대에 불과하던 때였다. 페이톤 제품 특성을 고려해 빠른 작업보다 완성도 높은 세밀한 공정도 자랑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결국 페이톤은 실패한 차종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유는 페이톤에 부착된 ‘폭스바겐(VW)’ 라벨이 ‘프리미엄’ 이미지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이톤이 뛰어든 고급 대형 세단 시장은 벤츠, BMW, 포르쉐, 캐딜락 등 전통적인 강자들이 즐비하다. 중소형차 중심의 제품군을 가진 국민차 브랜드가 말 그대로 국민 고급차를 시도했는데 ‘국민(Volks)’ 중에서 고급차를 살 사람은 적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국민은 굳이 페이톤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한 마디로 ‘국민=고급차’를 노렸던 폭스바겐의 생각이 시장에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후 실패를 계기로 폭스바겐그룹 내에선 별도 브랜드 얘기가 흘러 나왔다. 토요타의 렉서스, 현대차의 제네시스처럼 폭스바겐 라벨은 중소형 차종에 붙이되 페이톤과 투아렉 등에는 별도 고급 브랜드를 신설하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룹 내 포르쉐, 아우디 등의 프리미엄 브랜드가 있는 데다 신규 브랜드 육성에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고급 브랜드 전략은 없던 일이 됐다.
물론 당시 페이톤 인기가 높았던 한국은 ‘수입차=프리미엄’이고 ‘페이톤=수입차’라는 점에서 고급차로 인식됐고, 중국의 경우 가장 인기 있는 해외 브랜드가 폭스바겐이었던 만큼 판매는 나름 성공을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폭스바겐=대중 브랜드’ 이미지가 확산되며 페이톤의 주목도는 하락했다. 동시에 미국과 유럽에선 ‘폭스바겐=국민차’ 이미지가 워낙 확고해 시장 진입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결국 페이톤은 단종됐고 폭스바겐의 고급차 진출은 실패했다.
이후 ‘폭스바겐’은 자신들의 강점에 치중했다. 세계적으로 중소형 차종에 강한 회사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중소형 차종을 선택하는 소비자에게 ‘가격’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 마디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야 중소형 시장에서 지배력이 확대된다. 경쟁력에서 멀어지면 소비자도 견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속적으로 오르는 생산 비용 부담에 가격 경쟁력마저 점차 약화됐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중국 내 사업 확대다. 생산 비용이 독일 대비 40% 가량 저렴한 중국 생산으로 국민차의 가격 경쟁력을 높였다.
하지만 대중적인 자동차라는 이유로 중국 내에서 신흥 추격자의 도전 대상이 됐다. 전기차로 점유율을 확대하려는 새로운 도전자가 늘었고 이들은 기아와 현대차를 주저앉힌 경험을 앞세워 폭스바겐 브랜드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 내 판매가 쪼그라들었고 대안으로 중국 생산 물량의 유럽 수출을 추진했지만 유럽과 중국 간의 갈등으로 장벽이 생긴 데다 중국에서 줄어든 판매 물량을 유럽 시장이 온전히 흡수할 규모도 되지 못해 고민에 빠졌다. 결국 생산을 줄여야 하는 것이 현재로선 유일한 돌파구다.
그럼 어디에서 줄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때 꺼내든 카드가 생산 비용이 높은 독일 내 공장의 축소다. 생산 비용이 인건비와 연동된 만큼 가장 비싼 생산지부터 규모를 줄이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이때 걸림돌이 독일 정치권이다. 이들은 공장 폐쇄 등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규모를 줄이지 못하면 결국 비용 감당이 어려워 파산에 처할 수도 있다. 이때 선택 가능한 방법은 독일 이외 공장의 폐쇄, 한 마디로 중국 공장 축소다.
그러나 중국 공장은 폭스바겐 제품을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다. 중국 공장을 없애면 독일 내에서 생산해 중국으로 수출해야 하는데 이때 가격 경쟁력은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수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될 정도다. 그래서 폭스바겐도 현대차와 기아처럼 ‘중국 생산-동남아 수출’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이 경우 또한 ‘독일 생산-동남아 수출’ 감소로 연결돼 독일 공장에는 위협이다. 따라서 판매를 늘리는 게 유일한 대안이지만 세계 자동차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중국 내 토종기업 약진에 따라 사업 규모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게 고민이다.
주목할 점은 현대차와 기아의 국내 공장도 언제든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국내 생산’의 가격 경쟁력은 조금씩 떨어지는 중이다. 두 회사 모두 ‘국내 생산-국내 판매’ 이익은 높지 않다. 가장 많은 수익은 ‘해외 생산-해외 판매’에서 나오고 ‘국내 생산-해외 수출’이 그 다음이다. 하지만 국내 생산 비용이 높아지며 ‘해외 생산-해외 판매’의 역할도 점점 커지는 중이다.
게다가 글로벌 모든 나라가 이제는 현지 생산을 늘리라며 기업을 압박한다. 한국의 완성차 수출이 더이상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 프랑스는 한국 생산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지 않기로 했다. 이 말은 유럽 내 생산을 늘리라는 메시지다. 어떻게 하면 생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을까? 폭스바겐 위기를 계기로 한국도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때다.
박재용(자동차 칼럼니스트, 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