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에 충실한 원초적인 디자인 갖춰
-듬직한 주행성능, 진짜 오프로더의 매력 보여줘
최근의 자동차 특히 SUV는 화려함과 편안함, 첨단 기능으로 가득하다. 소비자들은 이런 매력적인 상품성에 반응하며 산과 험로만 달리던 SUV의 주 무대를 도심으로 옮겨놨다.
그래서 그럴까. 정통 오프로더는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시장에 등장한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는 단번에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SUV가 원래 어떤 자동차였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듯 기계적인 순수함과 강력한 성능을 과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얼마 남지 않은 올해 만나본 차 중 가장 인상깊었다.
본격적인 시승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레나디어의 시작이 어떤 차였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영국의 화학기업 이네오스의 회장이자 모험가로 유명한 짐 래트클리프는 평소 즐겨타왔던 랜드로버 디펜더의 단종 소식을 접했다. 그에게 디펜더는 단순한 이동수단 그 이상이었기에 원하는 차를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그레나디어를 만들어냈다.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수류탄 투척병을 뜻하는 ‘그레나디어(Grenadier)’는 런던에 위치한 그의 단골 펍의 이름이다. 이 차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실제로 래트클리프 회장은 차를 만들며 그 어떤 요소도 아끼지 않았다. 외관부터 내부 구조, 심지어 조작 방식까지 철저히 실용적이고 기본에 충실하도록 만들었다. 주요 부품은 신뢰할 수 있는 제조사의 것들을 집대성했다.
결과물은 차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열광할 수 밖에 없다. 유행을 따라 쿠페의 실루엣을 따라한다거나 승용차의 느낌을 내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저 네모 반듯한 박스 형태로 차체를 평평하게 마감했을 뿐이다. 기교를 넣는 대신 직선적인 형태의 견고한 느낌을 강조했고 이는 수리와 관리가 용이하도록 설계한 결과물이다. 고된 오프로드에서 생존력을 극대화하고 유지보수를 쉽게 하는 한편 공간을 극대화 하기 위한 배려다.
차체 하부를 설계하는 데에는 3년여의 시간을 투자했다. 강력한 사다리꼴 프레임 섀시와 차체 곳곳에는 녹을 방지하기 위해 전기 화학 코팅과 캐비티 왁스, 파우더 코팅 등을 덧발랐다. 어떤 환경에서도 강건함을 유지한다는 자신감일까. 이네오스의 공식 수입원인 차봇모터스는 그레나디어의 부식 보증을 12년이나 내걸었을 정도다.
운전석 문을 열 때의 느낌부터 남다르다. 그럴싸한 소리가 나도록 경첩을 개량한 게 아닌 정말 묵직한 감각에서 오는 소리가 난다. 실내 장식도 최소화하고 오프로더에 걸맞게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꾸몄다. 높은 시트 포지션과 낮은 벨트라인으로 넓고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행 환경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차의 모든 구조 하나하나가 어떤 목적으로 설계됐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각종 장치들도 직관적이다.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버튼류는 큼지막하고 피드백도 확실하다. 백미는 항공기를 연상케 하는 오버헤드 콘솔. 오프로드에 관련한 기능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조작할 수 있도록 해 손쉽게 제어할 수 있다. 실내 주요 장치들은 IP54K 방수·방진 등급까지 충족했다. 이는 부품 내부에 먼지 유입 자체를 차단하는건 물론 어떤 방향에서 물이 튀더라도 기능에 영향이 없다는걸 의미한다.
파워트레인은 BMW가 공급한 3.0ℓ 직렬 6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B58). 여기에 ZF사의 8단 자동변속기를 매칭했다. BMW X5 40i부터 M340i까지 다양한 세그먼트의 다양한 성향을 아우르는 검증된 조합인건 익히 알려진 사실. 이를 바탕으로 최고출력 286마력을 발휘하며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을 통해 모든 바퀴에 힘을 전달한다.
시동을 걸 때도 그레나디어의 독특함이 느껴진다. 꽤나 흔해진 버튼 시동 방식 대신 키를 꽂고 돌려서 시동을 건다. 얼마만에 조작해보는 키 방식인지 새삼 반갑다. 시동과 함께 깨어난 6기통 엔진과 함께 센터페시아에 위치한 디지털 나침반이 빙글빙글 돌며 환영 인사를 건넨다.
주행감각은 실내외 스위치의 조작감, 그리고 그레나디어의 외관 만큼이나 선이 굵고 힘이 넘친다. 변속기를 D 모드에 놓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순간부터 박차고 나가는 반응이 박력 있다. 가속 페달을 깊숙이 밟으면 직렬 6기통 특유의 묵직한 엔진음과 함께 힘차게 내달린다. 제원상 시속 0에서 100㎞/h까지 8.6초 만에 도달하지만 차체가 묵직해 체감 가속은 훨씬 빠르게 다가온다.
핸들링 성능은 매우 여유있는 편. 스티어링 휠 조작감이 묵직하고 유격도 큰 탓이다. 흔히 쓰는 랙 타입의 전동식 스티어링 휠(R-EPS)을 쓰는 대신 오프로드에서의 내구성 확보를 위해 트럭이나 군용차에서 쓰는 리서큘레이팅 볼 타입을 썼기 때문이다. 혹자는 조작감이 둔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90년대의 고급 세단을 운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프레임바디 기반의 오프로더라서 고갯길에선 다소 허둥댈 것 같았는데 그게 또 아니다. 꽉 조여진 견고한 하체는 전혀 허둥대지 않는다. 오랜 기간 공들여 개발한 섀시와 올린즈 서스펜션, 브렘보 브레이크, BMW의 파워트레인까지. 내로라하는 좋은 재료를 알맞게 잘 버무려낸 결과물은 찬사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도로의 상태가 어떻건 일관적인 승차감도 인상적이다.
오프로드에서는 얼굴값을 한다. 마치 자연흡기 엔진 처럼 안정적인 토크를 발산해주는 덕분에 스로틀 조절에 큰 신경을 쓸 필요 없이 거침없는 주행이 가능하다. 걸어 올라가기에도 부담스러운 언덕에선 몇 번의 헛바퀴만 돌 뿐 거뜬하게 움직여준다.
너무 험한 길을 만났다면 중간 변속기를 제어하면 될 일이다. 2.5:1 비율의 저속 기어와 센터 및 앞뒤 디퍼렌셜 록을 제어하면 어떤 길도 갈 것만 같은 자신감이 넘쳐 흐른다. 최신 전자식 사륜구동처럼 구동력을 파악하고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왼쪽 바퀴가 5번 굴렀다면, 오른쪽 바퀴도 5번 굴러야하는 아주 단순한 논리로 장애물들을 헤쳐 나간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2스포크 타입의 스티어링은 조금 불만이다. 오프로드에서는 스티어링 휠을 몇 바퀴나 돌렸는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아서다. 아프리카 초원이나 고비사막을 쭉 달려나가며 직진만 해 나간다면 상관 없겠지만 좁은 길목을 헤쳐나가며 여러번 스티어링을 돌려야 하는 우리나라의 오프로드 환경에서는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다.
그럼에도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는 특별하다. 신생 브랜드에서 만든 첫 차임에도 불구하고, 차가 가진 완성도와 성능은 오랜 경력의 노련한 장인이 만든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레나디어가 주는 감성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견고한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SUV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처럼 첨단 장비와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차들이 주를 이루는 시대,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차를 마주하는 경험은 더욱 특별했다.
이네오스 그레나디어의 가격은 1억990만원부터 시작한다. 지프 랭글러의 가격이 1억원을 바라보는 시대라는걸 생각하면 결코 비싸다는 생각도 안든다.
인제=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