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다루는 방식, 출력보다 인상적
-억누르지 않고 제어하는 독일 도로 문화돠 닮아
-그림의 떡?...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기를
독일 서부의 도로는 이상할 정도로 골프 R에 잘 어울렸다. 라인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오래된 성터와 끝없는 포도밭, 언제 지어진 건지 감조차 오지 않는 회색빛 성당들 사이로 아우토반과 국도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이다르 오베르슈타인과 모젤 계곡, 몽샤우까지 약 450㎞를 달리는 동안 느낀 건 오래된 시간과 가장 빠른 이동이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독일이라는 나라 특유의 분위기였다.
도로 문화 역시 흥미롭다. 아우토반은 놀라울 정도로 매끈하게 닦여 있었고, 왕복 2차선 시골 국도에서도 시속 100㎞ 제한이 자연스럽게 허용됐다. 대신 마을 진입부에는 어김없이 씨케인과 회전교차로, 좁아지는 차선이 등장했다. 속도를 무조건 억누르기보다 어디에서 줄여야 하는가를 도로 설계 자체로 이해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 골프 R은 바로 그런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차였다.
▲디자인&상품성
골프 R은 멀리서 봤을 때부터 요란한 차는 아니다. 거대한 윙이나 과장된 공기흡입구로 존재감을 밀어붙이는 타입도 아니다. 대신 가까이 다가갈수록 일반 골프와는 다른 디테일이 차곡차곡 보인다. 골프라는 익숙한 해치백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곳곳에 R만의 긴장감을 심어둔 방식이다.
전면부는 가장 먼저 범퍼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새롭게 디자인된 범퍼는 일반 골프보다 훨씬 낮고 넓게 깔린 인상을 준다. 하단에는 하이글로스 블랙 마감의 에어로다이내믹 요소와 블랙 벤틸레이션 그릴, 모터스포츠 스타일의 프런트 스플리터가 자리한다. 전면을 과격하게 찢어놓기보다, 차체 아래쪽에 무게감을 집중시켜 고성능차다운 자세를 만든다.
그릴에는 R 로고와 블루 라인이 더해져 GTI의 빨간 선과는 다른 차분한 고성능 이미지를 만든다. LED 플러스 헤드라이트와 일루미네이티드 폭스바겐 로고, 좌우를 잇는 LED 라이트 스트립 등 기존 골프에서 볼 수 있던 요소들은 기존 골프에서 볼 수 있던 형상 그대로다.
측면은 골프 R의 성격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해치백 특유의 짧고 단단한 비율은 그대로지만 차체를 받치는 휠과 브레이크, 미러 디테일이 분위기를 바꾼다. 무광 크롬 미러 하우징에는 R 로고 프로젝션 기능이 들어가고 사이드미러와 휠 허브캡, 브레이크 캘리퍼에도 R 로고가 반복된다.
옵션으로 제공되는 19인치 바르메나우 단조 휠은 휠 동급 알로이 휠보다 약 20% 가볍다. 그 결과 림당 8㎏의 무게를 덜어내는 역할을 한다. 단순히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핸들링 향상에 기여했고 브레이크의 냉각 효율도 더 좋아졌을 테다.
후면부는 골프 R이 가장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새로운 LED 테일라이트 클러스터와 R 디자인 범퍼, 하이글로스 블랙 디퓨저가 적용됐고 좌우 각각 두 개씩 배치된 쿼드 배기구가 고성능 해치백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퍼포먼스 패키지를 적용하면 대형 루프 스포일러도 더해진다. 전면과 측면이 절제된 긴장감이라면 후면은 이 차가 평범한 골프는 아니라는 점을 가장 분명하게 말한다.
실내도 마찬가지다. 골프 특유의 단정한 구성 안에 R 전용 감각을 더했다. 12.9인치 독립형 디스플레이와 R 전용 그래픽, 개선된 메뉴 구조가 적용됐고 운전석 주변은 불필요한 장식보다 기능과 조작에 집중했다. 화려함보다 정확함에 가까운 구성이다. 골프 R이 지향하는 방향도 결국 여기에 있다. 보여주기 위한 고성능차가 아니라 매일 탈 수 있는 차 안에 가장 강한 골프의 성격을 담았다.
▲성능
독일 서부 산길은 단순히 코너가 많은 수준이 아니다. 좁고 빠른 블라인드 코너가 이어지고 노면은 계속 요철과 고저차를 만든다. 차체가 압축됐다가 다시 튀어오르는 움직임이 반복된다. 그렇다소 아우토반처럼 매끈하지도 않다.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를 잘게 찢어 일반도로 위에 뿌려놓은 느낌에 가까웠다.
이런 길에서는 단순히 출력 높은 차보다 섀시와 구동계 밸런스가 좋은 차가 훨씬 빠르다. 골프 R은 바로 그 부분이 강했다. 2.0ℓ EA888 에보4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333마력, 최대토크 42.8㎏·m를 낸다. 수치 자체도 충분히 강력하지만 진짜 핵심은 토크가 터지는 방식이다. 저회전부터 토크가 두껍게 깔리고 회전수를 올릴수록 억지로 쥐어짜는 느낌 없이 끝까지 밀어붙인다. 7단 DSG는 '한 단 내려야 하는 순간'을 굉장히 정확하게 읽는다.
흥미로운 건, 이 차가 생각보다 꽤 편안하다는 점이다. 보통 300마력이 넘는 고성능차들은 서스펜션부터 긴장감을 준다. 노면 정보를 지나치게 예민하게 전달하거나 일상 주행에서도 차가 계속 운전자에게 집중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골프 R은 달랐다. 독일 장거리 투어링 문화 위에서 만들어진 차답게 기본적인 승차감 자체가 상당히 유연하다.
특히 컴포트 모드에서는 그 성격이 더 분명해진다. 댐퍼가 불필요하게 딱딱해지지 않고 요철을 한 번 걸러낸 뒤 차체를 안정적으로 다시 눌러준다. 빠른 차인데도 장거리 이동에서 피로감이 크지 않은 이유다. 독일차 특유의 단단하지만 피곤하지 않은 승차감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반대로 스포츠와 레이스 모드로 들어가면 차의 긴장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스로틀 반응과 변속 타이밍, 배기 사운드가 훨씬 예민해지고 스티어링 역시 무게감이 짙어진다. 특히 레이스 모드에서는 차체 움직임 자체가 굉장히 단단하게 조여진다. 브레이킹에서 앞을 눌러놓고 코너에 진입했을 때 차가 노면을 움켜쥔 채 자세를 유지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스페셜모드였다. 사실상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를 위한 세팅. 이름만 들으면 가장 과격한 트랙 모드처럼 느껴지지만 성격은 의외다. 오히려 레이스 모드보다 서스펜션을 조금 더 부드럽게 풀어놓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노르트슐라이페는 일반적인 서킷처럼 매끈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저차와 범프, 압축과 리바운드가 계속 반복되는 거친 노면에서는 무조건 단단한 세팅보다 타이어를 노면에 계속 붙여두는 쪽이 더 빠르다.
실제로 독일 산길에서도 스페셜 모드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차체를 과하게 조이지 않으면서도 접지력을 계속 유지했고 노면 굴곡 위에서도 바퀴가 지면을 놓치지 않았다. 빠른데 편안하다는 골프 R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모드처럼 느껴졌다.
GTI와 가장 크게 다른 건 역시 구동감이다. 전륜 기반 특유의 장난스러운 움직임을 만든다면 골프 R은 노면을 움켜쥔 채 차를 바깥으로 쏴버리는 타입이다. 특히 코너 탈출에서 차이가 크다. 보통 전륜 기반 해치백은 출력을 빨리 쓰면 바깥으로 밀리거나 스티어링을 다시 풀어줘야 하는데, 골프 R은 오히려 스로틀을 더 열수록 뒤가 차를 밀어낸다.
핵심은 R 퍼포먼스 토크 벡터링이다. 단순한 사륜구동이 아니라 뒤 좌우 바퀴에 토크를 적극적으로 나눠주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하면 코너 안쪽 바퀴를 잡아주는 수준을 넘어 바깥쪽 뒤 바퀴를 더 강하게 밀어 차를 코너 안으로 말아 넣는다. 그래서 차가 무겁게 버티는 느낌보다 뒤에서 살짝 회전하며 자세를 만들어주는 감각이 난다.
재밌는 굉장히 빠른데도 운전자를 겁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체감상으로는 전자장비가 개입한다는 느낌보다 차가 원래 이렇게 세팅된 것 같다는 감각에 가깝다. 브레이킹으로 앞을 눌러놓고, 스티어링을 돌린 뒤 가속 페달을 을 세게 밟는 동작을 반복해도 차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흥분한 마음에 한 템포 빠르게 달려도 리듬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밸런스만 좋은겅 나이다. 아우토반에서는 골프 R의 독일차다운 성격이 더 진하게 드러났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차체가 노면 위에 더 단단하게 눌린다. 고속에서 스티어링을 살짝 수정해도 차가 붕 뜨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특히 시승 내내 이어진 빗길에서 더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 빗길 고속 주행은 계속 긴장을 만들지만, 골프 R은 신뢰를 계속 준다.
▲총평
골프 R은 골프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차다. GTI처럼 가볍게 웃으며 달리는 차는 아니다. 대신 더 빠르고, 더 안정적이며, 더 정교하다. 실용적인 해치백. 그런데 운전자가 굳이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만드는 차라고 해야할 것 같다. 이것이 골프가 반 세기 넘게 유지해 온 힘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골프는 계속 재밌어야 한다. 그리고 골프 R은 그 가치를 아주 뚜렷하게 보여준다.
골프 R이 한국에 들어올까. 사실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골프 R이 계속 '그림의 떡'으로만 남기에는 아깝다.
뉘르부르크(독일)=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