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를 벗고 본명으로 돌아온 토요타
-길 잃은 해밀턴, 가장 잘 아는 길에서 돌아오다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난 주말 치러진 르망24시와 F1 카탈루냐 그랑프리를 보며 문득 이 문장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두 도시를 통해 하나의 시대를 이야기한 소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다.
이걸 지난 주말에 비유하자면 24시간의 레이스였고, 66랩의 레이스였다. 지구력의 무대였고, 순간의 예술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오랜 침묵 끝의 귀환이었다. 2026년 6월의 둘째 주말, 르망과 바르셀로나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타올랐다.
▲첫 번째 도시, 르망
프랑스 북서부의 도시 르망은 매년 6월이면 다른 얼굴을 한다. 인구 14만의 조용한 지방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혹한 레이스의 수도가 된다. 1923년에 시작해 벌써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은 수많은 브랜드의 탄생과 몰락을 지켜봤다. 영광도, 굴욕도, 그리고 귀환도.
토요타는 이번 르망에 '토요타 가주 레이싱'이 아닌 '토요타 레이싱'으로 나섰다. 언뜻 단순한 팀명 변경처럼 보이지만 가주 레이싱은 오랜 기간 토요타의 '도전 정신'을 상징해왔다. 르망에서의 우승도, WRC를 제패한 것도 가주 레이싱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토요타는 이제 그 이름을 내려놨다.
제갈량은 북벌에 나설 때, 출사표에 '신은 본디 남양의 필부였습니다' 라고 적었다. 초야에 묻혀 이름을 숨기던 사람이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의 문장이다. 가주라는 이름 뒤에 있던 토요타가 본명으로 르망에 선 것은, 제갈량의 출사표와 닮아 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선언. 어쩌면 가주라는 이름 자체가 변장이었을지 모른다. 모리조가 가면을 쓰고 달렸던 것처럼, 토요타는 가주라는 이름 아래서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수식어도 부제도 없이 '토요타'라는 세 글자만으로 르망에 섰다. 자신감이자 귀환의 메시지였다.
결과는 그 선언에 부응했다. 토요타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르망을 지배한 팀이었다. 그러나 이후 3년, 페라리가 연속으로 정상을 차지하는 동안 토요타는 왕좌를 내줘야 했다. 그리고 본명을 되찾은 해 우승도 되찾았다. 381랩. 통산 여섯 번째 르망 제패.
다만 그 귀환은 순탄하지 않았다. 예선에서 두 차량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그리드를 받아들고 레이스에 임했다. 7번 차는 초반에 펑크를 맞아 중위권 싸움에 끌려 들어갔고 8번 차는 한때 선두를 달리다 9시간째 코스를 벗어나며 드라이브스루 페널티를 받았다. 브레이크 수리까지 감내해야 했다.
르망은 토요타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른 연료 보급 전략으로 클리어 랩을 확보했고 특히 이른 아침 시간대 압도적인 페이스로 선두권을 파고들었다. 잔여 6시간을 앞두고 세이프티카가 필드를 리셋했을 때 두 차는 이미 선두 다툼 안에 있었다. 그리고 브렌든 하틀리와 닉 드 브리스의 과감한 추월로 토요타는 원-투 체제를 만들었다.
우승을 확정지은 코바야시 카무이는 레이스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르망 24시간이라는 레이스의 본질을 가장 압축한 문장이었다. 속도의 증명이 아니라 지속의 증명. 35만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명을 되찾은 팀이 그 증명을 완성했다.
▲두 번째 도시,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있다. 가우디가 설계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그럼에도 여전히 지어지고 있는 성당. 착공 이후 140년이 넘도록 미완성인 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건축물. 바르셀로나는 오래 걸리는 것들이 결국 완성되는 도시다.
르망에서 토요타가 밤새 달리고 있던 같은 날, 카탈루냐 서킷에서는 루이스 해밀턴이 체커기를 받았다. 페라리 유니폼을 입고서는 처음이었다. 이적 후 무려 31번째 경기만에 가장 먼저 받아낸 체커기였다.
단테는 신곡을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여정 중간쯤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었다." 해밀턴의 2025 시즌이 꼭 그랬다. 팀 동료 샤를 르클레르가 7번의 포디움에 올라서는 동안 해밀턴은 포디엄 한 번 없이 시즌을 마쳤다.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단테의 여정이 결국 천국으로 이어졌듯 해밀턴은 바르셀로나에서 선두로 결승선을 통과했다.106번째 우승은. 숫자보다 서사가 더 진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해밀턴다운 방식으로 돌아왔다. 선두권 대부분이 미디엄 타이어를 선택한 출발선에서 페라리는 해밀턴에게 소프트를 신겼다. 위험 부담이 큰 선택이었다. 초반 러셀이 완벽한 스타트로 선두를 가져갔고 50도를 웃도는 노면 온도는 타이어를 빠르게 갉아먹었다.
해밀턴은 12랩 만에 가장 먼저 피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쟁팀보다 한 번 더 많은 3스톱 전략을 택했다. 새 타이어를 신은 해밀턴은 랩당 2초 이상 빠른 페이스로 러셀을 조였다. 결정적 순간은 알론소의 리타이어가 불러온 VSC였다. 페라리는 그 찰나에 마지막 피트스톱을 끝냈고 해밀턴은 선두를 유지한 채 트랙으로 복귀했다. 남은 24랩,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41세의 나이로 체커기를 받으며 1970년 이후 F1 최고령 우승자가 됐다. 하필 해밀턴에게 카탈루냐는 통산 일곱 번째 우승을 거둔 서킷, 그 어떤 드라이버도 카탈루냐 트랙에서 그만큼 이긴 사람은 없다. 길을 잃었다고 여겨졌던 사람이, 가장 잘 아는 길 위에서 돌아왔다.
▲두 도시가 만나는 곳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런던과 파리, 혁명과 일상, 희생과 사랑이 교차하는 이야기다. 두 도시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결국 같은 것을 향한다.
르망과 바르셀로나도 그랬다. 하나는 24시간을 버티는 이야기였고, 하나는 66랩을 앞서는 이야기였다. 르망은 지속의 미덕을 시험하고, F1은 순간의 판단을 시험한다. 형식도, 리듬도, 요구하는 덕목도 달랐다. 그러나 두 도시에서 동시에 완성된 것들은 모두 오래 기다려진 것들이었다. 3년의 공백을 딛고 본명으로 정상에 돌아온 팀, 2년의 침묵을 깨고 가장 잘 아는 길 위에서 다시 우승한 드라이버.
귀환이 감동적인 이유는 단순히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떠나 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타의 3년, 해밀턴의 2년. 그 공백이 없었다면 이 주말의 장면들은 지금처럼 오래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빛이 의미를 갖는 건 그 이전의 어둠이 있었기 때문이듯 귀환의 무게는 기다림의 길이에 비례한다.
두 도시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한다. 기다림이 길수록, 도착의 무게가 달라진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