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EV 스포츠세단에서 전기 SUV로 전환
피스커자동차의 창업자인 헨릭 피스커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9년 스위스 제네바모터쇼 현장이었다. 시선이 집중(?)되는 전기 스포츠세단 카르마 컨셉트를 내놓으며 유럽 시장의 성공 가능성을 타진 중이었는데 당시 전시 부스에 들어가 한국도 전기 스포츠카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자 양산되면 진출하겠다던 야심찬 모습이 떠오른다.
갑자기 헨릭 피스커가 떠오른 이유는 최근 피스커가 폭스콘과 손잡고 역동성이 강조된 전기 SUV "오션(Ocean)"을 만들겠다는 계획 탓이다. 2007년 이미 피스커자동차를 만들며 시작한 그의 오래된 야망이 실현될지 무척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BMW Z8, 애스톤마틴 DB9 등의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헨릭 피스커(Henrik Fisker)가 자신의 이름을 딴 피스커자동차를 설립한 때는 2007년이다. 이듬해 그는 카르마(Karma)로 명명된 PHEV 레인지 익스텐더 컨셉트를 미국에 선보이며 고효율 전기 스포츠세단으로 주목받았다. 미국 정부는 카르마에 내장된 2.0ℓ 발전용 엔진과 배터리 자체 전력으로 이동 가능한 거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효율을 ℓ당 51㎞로 인증하며 PHEV 레인지 익스텐더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2009년 피스커는 카르마를 스위스 제네바모터쇼에 출품했고 당시 현장에선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51g에 불과한 전기 스포츠 세단이 부각되며 미래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07년 컨셉트로 등장한 카르마의 상용화 과정은 그야말로 산을 넘고 또 넘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창업자인 피스커는 초기 60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조성해 카르마 컨셉트를 완성했지만 북미국제오토쇼에 등장한 2008년 해당 제품을 본 테슬라는 이 회사가 모델S의 기술을 일부 훔쳤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피스커는 2009년 미국 내 10만대 양산 체제 구축을 앞세워 미국 정부로부터 약 6,000억원 조달에 성공하며 2011년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카르마의 소비자 인도에 돌입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2개의 전기모터로 최대 403마력을 뽐내던 카르마의 배터리 문제가 불거졌다. MIT에서 소재 기술 이전을 받아 개발된 A123 배터리에 심각한 불량이 발견되면서 피스커 또한 카르마 리콜 조치를 해야 했고 동시에 배터리 수급에도 차질이 생겼던 탓이다. 그 결과 5개월 동안 제품 생산이 멈춰섰고 카르마 이후 두 번째 내놓으려 했던 피스커 아틀란틱 개발마저 중단되며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나아가 미국 정부는 카르마의 제품 성격을 고려할 때 세금 지원이 합당한가를 따지며 자금 조달 규모를 축소했다.
어려움에 처한 피스커 이사회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2012년 헨릭 피스커를 회장으로 높이되 크라이슬러 사장 출신의 톰 라소다를 CEO로 영입했다. 피스커는 기업의 상징적인 인물인 만큼 말 그대로 상징으로 남겨두고 톰 라소다가 회사를 진두 지휘토록 했다. 그리고 약 4,4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며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피스커와 새로운 CEO 간의 갈등이 촉발되며 톰 라소다가 6개월 만에 회사를 떠났다. 그러자 GM에서 PHEV 레인지 익스텐더 제품인 쉐보레 볼트(VOLT) 개발 주역이었던 토니 포사왓츠가 피스커의 CEO에 올랐다. 카르마와 볼트 모두 "PHEV 레인지 익스텐더"라는 동력 시스템의 공통점이 있었던 게 배경이다.
이제야 자동차기업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약진하려는 피스커의 평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허리케인이 카르마 330대가 실린 유럽행 선박을 강타하면서 손상을 입었다. 바닷물이 배에 유입되면서 차가 물에 잠겼는데 16대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물론 보험사와 합의는 했지만 제품의 소비자 인도가 지연되는 등 그에 따른 후유증이 컸다. 결국 여러 악재를 견디지 못해 헨릭 피스커는 2013년 사임했고 피스커자동차는 그해 말 파산 선고와 함께 홍콩기업을 거쳐 앞서 A123 배터리를 인수한 중국 완샹그룹에 매각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헨릭 피스커는 브랜드와 상표 권리를 지켜냈다. 이에 따라 완샹그룹은 자신들이 인수한 피스커자동차의 사명을 카르마자동차로 바꿨고 카르마 기반의 PHEV 제품인 카르마 레베로 PHEV를 내놓은 반면 헨릭 피스커는 피스커 INC를 설립해 개발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피스커 INC는 2023년부터 폭스콘과 손잡고 미국 내에서 전기차 생산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그 사이 PHEV 레인지 익스텐더 특허는 카르마자동차로 이전된 만큼 헨릭 피스커는 BEV를 위한 새로운 플랫폼 개발도 완성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13년 전과 달리 이미 전기 스포츠카 시장의 참여자가 늘어난 지금 헨릭 피스커의 열정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결과는 모르지만 적어도 2009년 제네바에서 보여줬던 자신감은 여전한 것 같아서 기대를 걸고 싶다.
권용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