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는 뒷전, 생산이 곧 경쟁력
"11월이 되면 출고 적체만 70만대를 넘는다. 그야말로 생산 전쟁이다." 며칠 전 완성차업계 고위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다.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글로벌 모든 자동차회사의 생산이 부족한 탓이다. 반도체를 만들어 공급하는 수량이 제한돼 있으니 이른바 판매 경쟁은 사라지고 생산 여부가 곧 점유율 확대와 직결된다는 뜻이다.
실제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1~9월 국내 자동차 판매는 총 130만2,930대로 전년 동기 대비 6.3% 줄었다. 비록 전년 대비 줄었지만 출고 적체만 아니었다면 내수판매는 사상 최고에 도달했던 지난해 188만대를 넘길 정도로 수요가 회복됐다.
반도체로 인한 생산 부족은 제조사에게 우선 생산 차종을 고르도록 만들기 마련이다. 확보된 반도체를 어떤 차종에 먼저 적용해야 이익 극대화를 실현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당연한 상식은 수익성이 좋은 제품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그래야 전체 판매대수가 줄어도 수익은 보전되는 탓이다. 또 하나의 조건은 평균 탄소 배출량 충족이다. 수익이 좋아도 배기량이 커서 탄소 배출량이 많으면 평균 배출가스가 늘어 규제 대상이다. 따라서 대당 수익과 탄소 배출량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넣었을 때 가장 최상의 이익을 내는 차종에 반도체가 우선 공급될 수밖에 없다.
이런 두 가지 조건을 감안했을 때 우선 생산 차종은 프리미엄과 친환경 제품이다. 그런데 제조사 시각에서 친환경 제품은 수익보다 탄소 배출량 기준 충족이 우선이다. 다시 말해 많이 만들어 팔아봐야 수익이 적은 만큼 최소 기준 충족 수준에서 생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올해 평균 탄소 배출량을 충족했다면 많이 만들지 않는 게 제조사로선 최선(?)이다. 게다가 일부 지자체는 보조금도 바닥났으니 출고 적체 길다고 생산을 늘렸을 때 자칫 계약자가 포기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반면 프리미엄 제품은 수익성이 높아 최대한 많이 만들어 파는 게 유리하다. 대부분 중대형 고급 세단 또는 SUV 등이다. 현대차의 3분기 생산이 줄었음에도 영업이익이 1조6,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증가한 것도 반도체를 최우선 투입한 결과다. 물론 지난해 같은 기간 엔진 품질 비용 등을 반영한 기저효과도 있지만 수익성을 위한 프리미엄의 우선 생산은 당연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럼 대체 어떤 차종의 출고 적체가 심할까? 경차 캐스퍼는 이미 계약이 생산을 넘었고 포터와 봉고 트럭은 6개월 이상 대기하는 게 다반사다. 심지어 1t 소형 화물은 출고 적체 뿐 아니라 판매 수량도 일부 제한하는 상황이다. 그 결과 소형 화물트럭을 특수용으로 개조하는 특장 업체도 개점 휴업이다. 연간 1,000대 정도의 소형 트럭을 특장 개조로 판매하는 중소 기업 대표의 한숨은 그래서 더욱 씁쓸하다. 그는 “소형 화물 트럭 생산 자체가 워낙 부족하다보니 특장은 물론 소형 물류용 중고 트럭 가격도 크게 올랐다”며 “기존에 주문한 트럭 물량도 언제 나올지 몰라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한다.
출고 적체의 여파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반드시 차가 필요한 사람은 출고 대기가 길어질수록 급한대로 중고차를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고차는 새 차가 공급돼야 시장에 매물도 많아지는 구조여서 매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국토교통부 자동차등록 현황에 따르면 올해 월 평균 중고차 거래대수는 32만대로 지난해와 비슷하지만 중고차 업계는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차종의 공급 부족이 그대로 중고차에서도 나타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덕분에 인기가 없는 차종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는 전언도 남겨준다. 중고차 수출도 감소세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고차 수출은 지난 5월을 고점으로 떨어져 9월에는 3만3,943대로 감소했는데 관련 업계는 출고 적체가 길어질수록 수출 물량도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다.
새 차가 나오지 않으면서 금융 부문도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공장에서 출고돼야 직접 구매 및 렌탈 또는 리스 활용 때 금융이 발생하지만 생산 자체가 크게 줄었으니 운용 물량도 줄어드는 구조인 탓이다. 이외 폐차도 줄어드는데 한국자동차해체재활용업협회 통계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월 평균 폐차는 7만4,000대로 지난해와 비교해 5,000대 가량 줄었다.
물론 일시적으로 혜택을 입는 곳도 있다. 타던 차의 보유 기간이 늘어날수록 소모품 교환 등의 정비 수요도 많아지고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하는 탓에 자가용 이동이 확대되면서 연료 수요가 많아 정유사는 물론 정부도 세입이 확대된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올해 6월까지 국내 소비된 휘발유는 모두 4만839배럴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만8,764배럴 대비 늘었고 경유도 8만1,870배럴로 지난해 7만9,753배럴 대비 사용이 증가했다. 더불어 기름 사용 증가는 정부의 유류 세입도 늘리는 구조라는 점에서 완성차 공급 부족은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에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시작은 반도체 부족이지만 그 영향은 모두가 받는 구조다. 최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급망 문제"를 언급한 것도 미국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동차산업의 연쇄 반응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고 이는 그만큼 자동차산업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박재용(자동차 칼럼니스트, 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