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코리아 사명 변경의 추억
1992년 삼성그룹이 자동차사업 진출을 결정한 후 사업 파트너로 손잡은 곳은 일본 닛산이다. 닛산의 기술 우선 주의가 삼성의 1등 주의와 비슷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1994년 일본 닛산과 협력 계약을 체결했고 맥시마 기반의 SM5(Samsung 5) 중형 세단을 첫 차로 결정했다. 이후 4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마침내 1998년 2월 삼성자동차 SM5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삼성이라도 외환위기 벽을 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국내 자동차 수요를 급격하게 끌어내렸던 탓이다. 1996년 연간 123만대의 승용차가 팔리던 국내 시장은 1997년 외환위기가 도래하자 115만대로 줄더니 여파가 본격화된 1998년에는 불과 56만대로 폭락했다. 1999년 91만대로 전년 대비 늘었지만 하필 삼성자동차가 SM5를 내놓은 1998년부터 자동차 위기가 시작된 셈이다. 그럼에도 SM5는 승승장구했다. 삼성이 만들었고 당시만 해도 내구성 좋은 일본산 부품이 많이 포함됐다는 점에서 입소문을 타고 쏘나타를 위협했다.
-2000년 르노와 삼성의 만남 시작
그러나 자동차사업에 쏟아부은 돈이 워낙 막대했던 탓에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가 문제였다. 일본산 부품 비중의 원가 부담이 컸던 만큼 가격도 높아야 했지만 쏘나타와 경쟁하려니 고가 전략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래도 공장 가동을 위해 제품은 팔아야 했으니 돈은 끝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를 문제 삼은 곳은 정부와 정치권이다. 사려는 사람이 많아도 만들수록 손해인 구조에서 때로는 생산마저 멈추자 구조조정의 칼을 겨냥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곳이 프랑스 르노다. 해외 확대 전략을 추진하며 닛산과 공동체를 형성한 후 삼성자동차가 매각 대상으로 나오자 인수에 뛰어들어 2000년 9월 르노삼성자동차가 만들어졌다. 삼성자동차의 부산 공장을 아시아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르노의 전략적 인수였다.
이렇게 기업이 안정되자 SM5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바뀐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입소문을 타고 서로 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르노의 인수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특히 SM5 인기는 개인택시 사업자의 영향이 컸다. 고장 등에 워낙 민감한 업종인 탓에 가격은 쏘나타 대비 비싸도 고장이 적고 내구성이 뛰어나 오히려 경제적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져 나갔고, 이들이 탑승객에게도 구매를 추천하자 르노삼성은 보이지 않게 개인택시를 많이 지원했다. 결국 르노삼성은 2002년 SM5의 국내 판매를 연간 10만대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고 2003년 끝내 넘사벽으로 불렸던 쏘나타 판매를 뛰어넘자 현대차가 발칵 뒤집히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SM5가 쏘나타를 월 판매에서 앞선 것은 현대차 공장의 파업으로 생산이 중단돼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당시 해당 결과는 자동차 업계의 최대 이슈이기도 했다.
물론 늘 좋은 시절이 유지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기와 변화는 찾아왔는데 국내 시장이 세단보다 SUV 중심으로 바뀌며 소형 SUV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고민하던 르노삼성은 해외 생산 차종의 국내 도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첫 제품으로 2014년 QM3를 수입했다. 소비자가 찾는 제품이 다양해지는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국내 개발 및 생산은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어 르노의 여러 제품 중에서 적절한 차종의 수입 결정에 따른 행보였다. 반면 국내 생산 차종은 해외 수출에 주력하는 작전에 주력했다.
이후 수입 차종은 하나 둘씩 늘어갔다. QM3에 이어 후속이었던 캡처, 소형차 클리오, 초소형 트위지, 승합차 마스터까지 르노 제품이 투입됐다. 그렇다보니 "삼성"이라는 기업 이미지가 투영된 르노삼성과 확고한 프랑스 기업의 아이덴티티티를 보이는 르노 차종이 공존하게 됐다. 르노가 삼성을 인수할 때는 "르노" 이미지가 약해 "삼성" 사용을 유지했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르노는 결국 삼성을 떼어냈고 르노코리아로 사명을 바꾸었다. 이제부터는 "삼성"과 영원히 결별하고 "르노"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가져가려는 행보다. 르노는 22년 만에 삼성의 흔적을 완전히 없앤 것이고 삼성은 1992년 자동차 사업 결정 후 30년이 흘러서야 자동차 흔적을 제거하게 됐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전자기업의 자동차사업 진출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서다. 그래서 사명은 변경돼도 BEV 분야의 또 다른 협력 가능성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소니가 혼다와 손잡고 BEV 사업에 진출한 것처럼 삼성도 르노와 다시 손잡고 언젠가는 BEV에 뛰어들 것이라는 얘기 말이다.
권용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