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크로스오버의 등장, 수퍼카 영역 확장의 개념
수퍼카가 지상고를 높이고 오프로드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잘 닦인 아스팔트에서 벗어나 험로를 주무대로 삼는 차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것. 수퍼카 브랜드들의 단순한 실험일까, 아니면 새로운 흐름일까?
최근 몇 년간 람보르기니, 애스턴마틴, 페라리 등의 주요 수퍼카 브랜드는 성장 중인 SUV 시장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들의 SUV 출시는 오랜 기간 이어 온 브랜드의 정통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그러나 상업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 있었기에 SUV 시장 진출은 수퍼카 회사에게 거부할 수 없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와 달리 요즘 등장하기 시작한 오프로드형 수퍼카는 정통성 논란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기존 쿠페형 차체의 지상고를 높이고 오프로드에 적합한 품목과 액세서리를 추가해 수퍼카의 특징인 역동적인 디자인과 낮은 차체를 대부분 유지했기 때문이다. 굳이 세그먼트를 따지자면 수퍼카에서 파생된 크로스오버카인 셈이다.
사실 수퍼카 브랜드의 오프로드 진출 시도는 예전부터 있었다. 람보르기니는 1986년 LM 002를 내놓으며 오프로드로의 확장을 꿈꿨다. LM 002는 람보르기니 쿤타치의 V12 엔진을 얹은 오프로드형 제품이었지만, 정통 SUV에 가까운 디자인으로 수퍼카 카테고리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LM 002는 수퍼카보다 SUV인 우루스의 선조격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최근 시도 중인 오프로드형 수퍼카들은 모양새부터 SUV와 사뭇 다르다. 엔진 배치, 낮은 전고 등 수퍼카의 특징을 간직하면서도 높은 지상고와 4WD 시스템을 통해 험로를 달릴 수 있는 진짜 "오프로드"를 위한 수퍼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프로드형 수퍼카의 시초는 1992년 파리모터쇼에서 공개된 엑상(AIXAM)의 메가 트랙(Mega Track)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만든 메가 트랙은 메르세데스-벤츠에서 공수한 V12 5,978㏄ 엔진을 차체 중앙에 배치한 4WD 차로 성능과 구조, 스타일 면에서 모두 수퍼카의 기준을 만족시켰다. 여기에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오갈 수 있도록 지상고를 조절할 수 있는 유압식 서스펜션을 적용해 오프로드형 수퍼카의 콘셉트를 제시했다. 그러나 메가 트랙은 사업적으론 성공하지 못한 실험적인 케이스로 남았다. 1995년까지 고작 5~10대 정도만 생산된 것이 전부다.
이후 30년 가까이 잠잠하던 오프로드 수퍼카는 최근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차는 람보르기니 우라칸 스테라토와 포르쉐 911 다카르다. 2022년 공개된 우라칸 스테라토는 2019년에 등장한 콘셉트카의 양산형으로, 우라칸을 기반으로 험로 주행을 위한 디자인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오프로드 주행을 위해 지상고를 1.7인치 높이고 올터레인 타이어와 SUV처럼 휠하우스 감싸는 검은색 플레이트를 채택했다. 여기에 전면 LED 보조등과 루프랙, 엔진에 공기를 공급하는 루프 스쿠프를 탑재햇다. 최고출력 610마력을 발휘하는 V12 5.2ℓ 엔진과 7단 DCT 변속기는 기존 우라칸과 동일하지만, 오프로드에 최적화한 드라이빙 모드인 ‘랠리 모드’를 추가해 차별화했다. 우라칸의 마지막을 장식할 우라칸 스테라토는 1,499대 한정 생산을 통해 소장 가치를 더했다.
911 다카르는 이보다 더 많은 2,500대를 한정 생산하는 오프로드형 스포츠카다. 2022 LA오토쇼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 차는 다카르 랠리에서 활약했던 포르쉐의 헤리티지를 담았다. 사막을 주파할 수 있는 성능을 위해 기존 911 대비 지상고를 8㎝를 높이고 전면과 후면 범퍼 디자인을 변경했다. 여기에 올 터레인 타이어와 머드플랩, 루프 캐리어와 보조 조명 등 각종 액세서리를 더했다. 최고출력 437마력을 발휘하는 수평대향 6기통 3.0ℓ 엔진과 8단 PDK 변속기를 조합했으며 4WD를 통해 오프로드 성능을 확보했다.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콘셉트카도 빠지지 않는다. 2023 서울 모빌리티쇼에도 전시된 프로젝트 마이바흐가 여기에 해당된다. 프로젝트 마이바흐는 오프로드 환경 속의 전통적인 어반 브랜드를 표현한 2인승 전기 쿠페다. 2021년 타계한 디자이너 故 버질 아블로와의 협력을 통해 만든 콘셉트카로, 6m가 넘는 GT카를 오프로드 환경에 맞춘 디자인이 특징이다. 대형 오프로드 휠과 타이어는 물론, 범퍼와 측면, 루프를 관통하는 구조물을 통해 정통 오프로더의 느낌을 살렸다. 실내에도 아웃도어 어드벤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프레임이 드러난 시트와 손도끼, 공구함을 적용해 미래 아웃도어 모빌리티의 가치를 제시했다.
이렇게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오프로드 수퍼카는 어쩌면 SUV와 아웃도어 열풍으로 태어난 새로운 혼종일지 모른다. SUV보다 낮은 지상고로 오프로드에서 불리한 구조를 지녔으며, 기존 수퍼카가 지닌 낮은 무게중심이라는 이점이 희석된 목적 불명의 차가 될 소지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고가 자동차 시장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기도 한다. 쿠페형 세단이나 쿠페형 SUV도 단순한 크로스오버 개념이 아닌 감성적 접근법으로 탄생했다. 때문에 오프로드 수퍼카가 이제 실험을 넘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시각이 늘고 있다. 콘셉트카에서 양산차로 발전하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기존 수퍼카를 기반으로 만들기 때문에 적은 투자 비용으로 파생 제품을 만들 수 있음은 물론, SUV와 달리 정통성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장의 반응이다.
정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