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가스 규제 강화가 중국 영향력 키워
미국 내 자동차 관련 단체들이 정부를 상대로 배기가스 규제안 완화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나섰다. 규제 강화가 오히려 중국의 글로벌 전기차 영향력을 높여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전기차 주도권 싸움에 탄소 중립과 미중 간 패권 경쟁이 얽히면서 복잡한 역학 구도가 형성되는 셈이다.
미국 자동차관련 단체 "자동차 혁신동맹(Alliance For Automotive Innovation)"의 존 보
젤라(John Bozzella) CEO는 최근 미국 환경보호국(EPA)에 2032년까지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탄소 중립을 위한 배기가스 규제가 자칫 중국 전기차의 미국 내 시장 잠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미국이 IRA 등으로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지만 이에 맞서 중국 또한 우회 경로를 통해 미국 시장 진출을 적극 모색하는 데다 이미 중국산 테슬라 등이 캐나다에 진출한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형국이다. 실제 존 보젤라 대표는 EPA 규제안이 엄격할수록 중국이 미국 EV용 배터리 공급망에서 한층 더 강력한 발판을 구축하게 되고 결국 미국 자동차 시장 내 입지를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미국 내 이 같은 우려는 유럽연합의 선례에서 비롯됐다. 유럽연합이 2035년 내연기관 판매 금지를 도입하자 중국 전기차 및 배터리 기업들은 유럽에 앞다퉈 진출했고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는 중이다. PWC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유럽 내 주요 10개국의 BEV 판매는 36만2,000대로 전년 대비 26% 성장했다. 하지만 독일 통계청은 올해 1분기 독일로 수입 판매된 전기차 중에서 중국산 비중이 28.2%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SNE리서치 또한 유럽연합 전체에서 중국 배터리 기업들의 점유율이 2021년 22.6%에서 지난해는 34%로 늘어나 한국과 격차를 크게 줄였다고 분석했다. 유럽 내 전기차 시장이 커질수록 중국 전기차 및 배터리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구조로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올해도 중국 기업들의 성장이 더욱 가파를 것이란 예상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국산 전기차의 가격 경쟁력도 무섭다. 동급 기준으로 유럽 및 한국 브랜드 제품 대비 평균 1,000만원 이상 낮지만 1회 충전 후 주행거리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물론 상대적으로 에너지밀도가 낮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사용해 ㎾h당 주행 가능한 거리(㎞)는 짧지만 에너지 밀도 향상과 동시에 탑재 방식의 변화로 더 많은 셀을 적용하는 만큼 1회 주행거리는 유럽 및 한국 제품과 비슷하다. 전기차 구매자들의 관심이 단위효율보다 1회 충전 주행거리 및 가격에 있음을 파고든 결과다. 결국 저렴한 중국산 전기차가 유럽의 전기차 대중화 시장을 만들어가는 셈이다.
미국 내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된 것도 같은 이유다. 미국이 친환경 전기차 산업의 패권 확보를 위해 IRA를 만들고 배출 규제 강화라는 카드를 꺼냈지만 이런 조치가 오히려 중국의 전기차 패권을 도와주는 역할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 IRA 덕분에(?) 한국 배터리 및 완성차 기업들이 미국에 잇달아 공장을 짓고 유럽 브랜드도 미국 시장을 위해 비슷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를 IRA 효과로 포장하지만 중국에 기반을 둔 세계 최대 배터리기업 CATL이 미국에 우회 진출하고 일론 머스크는 중국산 테슬라를 미국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이미 미국 내 일부 자동차 판매사업자는 중국산 전기차 가격이 저렴한 탓에 보조금 없이 팔아도 미국산보다 싸다는 생각을 지우지 않는다. 유럽 내 중국산 전기차가 조금씩 스며들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확산되는 과정이 미국에서 재현되려는 움직임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기차로 전환되는 글로벌 자동차산업은 점차 강대국 간 패권 경쟁의 산물로 바뀌고 있다. 동시에 패권이 탄소 중립과 연결되며 상호 전기차 산업을 견제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경쟁이 심해질수록 오히려 탄소 중립이 늦춰질 수 있다는 얘기에 힘이 실리기도 한다. 탄소 중립은 모두가 동의하지만 산업 주도권을 가지려는 패권 경쟁이 전환 속도의 조절 역할을 만들어주는 형국이다. 중국의 전기차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미국이 내연기관 배출규제를 완화해 전기차 속도를 늦추면서 공급망 구축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탄소 중립도 결국은 국가 간 주도권 싸움의 산물이 되고 이때 전기차 보급 속도는 잠시 주춤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 주목할 것은 미중 간 전기차 힘겨루기의 양상이다. 중국에서 소재를 받아 배터리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완성차를 제조, 수출하거나 현지 생산에 몰두하는 우리로선 언제든 두 나라의 패권 싸움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다. 국가별로 대응 전략이 달라야 한다는 얘기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만약 중국이 배터리 소재 공급을 줄이거나 잠글 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보는 나라는 한국이다. 배터리를 만들지 못하고 전기차 생산은 당장 중단될 수 있다. 미중 간 전기차 주도권 싸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업의 불안한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권용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