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지향적인 디자인만으로 구매 이유 충분
-뛰어난 승차감, 고급 세단 못지않아
-리젠 버튼, 효율·편의 모두 챙길 수 있어
브랜드의 미래 방향성을 보여주는 최신 전기차에서 옛 캐딜락의 향수가 느껴진다면 믿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캐딜락 리릭이 딱 그런 차다. 한때 고급차의 기준과도 같았던 미국차 특유의 풍요롭고 넉넉한 패키징을 갖췄고 과거의 캐딜락을 연상케 하는 푹신하고 편안한 승차감까지 겸비했다.
리릭의 첫 느낌은 확실히 새롭다. 전면부에는 캐딜락 하면 떠오르던 거대한 크롬 그릴 대신 거대판 유광 블랙 패널이 자리잡고 있다. '블랙 크리스탈 쉴드'로 명명된 이 부위에는 조명을 내장해 하이테크적인 느낌을 더했다. 스마트키로 문을 여닫거나 탑승자가 가까이 다가가면 펼쳐지는 화려한 세레머니는 시각적 만족도를 더해준다.
차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리릭이 생각보다 크다는걸 알 수 있다. 전장 4,995㎜ 전폭 1,980㎜ 제네시스 GV80보다 길고 넓다. 특히 휠베이스는 3,095㎜에 달하는데 이는 기아 카니발 보다도 5㎜ 긴 수치다. 20인치 휠이 결코 작은 사이즈가 아님에도 어딘가 아쉽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이 거대한 덩치에 볼 게 생각보다 많다. 캐딜락만의 직선형 캐릭터라인은 더욱 웅장한 느낌을 강조한다. 플로우 스루 루프 스포일러와 매립형 도어 핸들 등 공기역학과 미학적인 부분을 모두 고려한 부분도 엿볼 수 있다.
백미는 후면이다. 테일램프가 리어 윈드쉴드 아래에서 시작해 C필러를 따라 루프까지 이어진다. 파격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캐딜락 엘도라도가 과감한 테일핀 스타일로 후미등에 기교를 넣었던 사례를 곱씹어보면 헤리티지의 연장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포테인먼트는 양산에 앞서 공개한 리릭 콘셉트와 비슷한 기조다. 클러스터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한 33인치 9K 커브드 LED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알루미늄, 원목, 나파가죽 등 각종 고급 소재를 간결하고 럭셔리하게 배치했다.
디스플레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뉜다. 스티어링 좌측 영역에서는 트립 및 헤드램프 제어가 가능하며 휠 안쪽 클러스터 영역에서는 속도 및 구동력, 배터리 잔량, 회생제동 수준 등 주행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메인 클러스터 화면은 드라이브 모드에 따라 두 가지 테마로 변경할 수 있으며 배터리 관련 정보 시인성을 높이는 별도의 테마로도 선택이 가능하다.
스티어링 휠 우측의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 영역에서는 차량 기능 설정 및 편의 옵션 설정을 포함해 드라이브 모드, 360도 카메라, 무선 애플 카플레이 및 안드로이드 오토, 사운드 시스템 등을 손쉽게 제어할 수 있다. 19개의 스피커로 구현한 AKG 오디오 시스템은 헤드레스트를 포함한 곳곳에서 생생한 사운드를 전달해준다.
곳곳의 디테일을 보면 미국차 특유의 투박함은 찾아볼 수 없다. 앞좌석 센터 암레스트는 여느 소품용 고급 탁자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매끈하며 정교하다. 시트의 독특한 퀼팅 패턴은 물론 소재 자체의 촉감도 만족스럽다. 지속가능성을 고려해 조금은 투박한 소재를 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캐딜락은 리릭이 전기차 이전에 럭셔리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열 만족도도 높은 편. 독립 제어가 가능한 공조 시스템은 물론 열선 시트와 충전 포트도 갖추고 있다. 등받이 각도를 최대한 젖히고 글라스 루프를 개방하면 여느 고급 세단 못지 않은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성인 남성이 앉아도 레그룸은 주먹 2개 가량이 나올 정도로 여유롭다.
아쉬운 게 없는건 아니다. 폰 프로젝션 기능은 33인치에 달하는 거대한 디스플레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구현 가능한 최대 면적을 확보했다는 게 캐딜락 측 설명이지만 곳곳에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일체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시트의 착좌감은 분명 훌륭하지만 레그서포트 등으로 방석 부위를 더 넓힐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리릭의 동력원은 102㎾h 대용량 배터리팩과 두 개의 전기모터다. 이를 통해 시스템 최고출력 500마력 최대토크 62.2㎏∙m을 발휘한다.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는 최장 465㎞. 190㎾급 고속 충전기를 이용하면 10분 충전만으로 약 120㎞를 갈 수 있는 전력을 채울 수 있다.
도로로 나와 리릭을 몰아 나가면서부터 놀라는건 정숙성이다. 거의 모든 전기차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임에도 더 조용하게 느껴진다. AKG 스피커가 선사하는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 덕분이다. 우리가 흔히 소음으로 받아들이는 영역대의 주파수와 반대 위상의 파형을 송출해 이를 상쇄시키는 원리다. 곳곳을 두른 이중접합 차음유리도 외부 소음 유입을 막아주는 데 힘을 보탠다.
승차감도 좋다. 에어서스펜션을 장착한 차 처럼 둥실둥실 떠가는 움직임을 보인다. 노면의 자잘한 진동 정도는 그냥 무시해버리는 느낌이다. 출·퇴근길에서 늘 마주하는 조금은 불친절한 과속방지턱과 도무지 메꿔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작은 포트홀을 밟고 지나가도 신경질적이지가 않다. 유럽차같아진 최근 캐딜락의 승차감 세팅과는 정 반대의 느낌이고 오히려 이쪽이 더 좋게 느껴진다.
물론 대책없이 출렁대는건 아니다. 깊숙한 코너를 돌아나가도 차체는 일관되게 안정적으로 기울어지고 돌아온다. 휠베이스가 길지만 차체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일체감도 뛰어나다. 부드러운 승차감이 계속 이어지다보니 뉴욕 중심가를 여유롭게 빠져나가는 그 옛날의 캐딜락 같은 느낌이다. 굳이 속도를 높이지 않아도 즐겁다.
그럼에도 달려야겠다면 리릭은 원하는만큼 달려가준다. 우리가 전기차에서 흔히 기대하는 폭발적인 가속감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라며 정신을 번쩍 들게한다. 500마력이 선사하는 어마어마한 힘은 속도를 아득히 올려놓는데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티어링휠 9시 방향 뒤편에 위치한 감압식 리젠 온 디밴드 버튼은 가장 칭찬하고 싶은 요소다. 왼손을 얼마나 세밀하게 조정하냐에 따라 풋 브레이크 못지 않게 부드러운 제동이 가능하다. 전기차의 회생 제동에 멀미를 호소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특정 브랜드가 아닌 국제표준으로 지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효율은 챙기면서 동승자도 고려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이날 서울과 포전을 왕복하는 약 100여㎞에서 측정된 효율은 3.5㎞/㎾h. 인증치(3.5㎞/㎾h)보다는 덜 나왔지만 무더운 날씨 탓에 에어컨을 가장 세게 튼 가혹 조건이라는걸 감안하면 효율은 좋다고 보는 게 맞겠다.
리릭은 과거 캐딜락의 특징을 잘 구현해 새로운 아메리칸 럭셔리의 지향점을 보여줬다. 최신 얼티엄 플랫폼과 빼어난 디자인 그리고 섬세한 디테일이 앞으로의 방향이라면 1970~1980년대의 캐딜락을 연상케 하는 편안한 승차감과 넉넉한 공간감은 앞으로의 캐딜락이 어떻게 나아갈지를 보여준다. 이렇다보니 전기차에 관심이 많은 얼리어답터들 못지 않게 과거의 캐딜락을 그리워하는 중·장년층에게도 잘 맞을 차겠다. 특별함과 과거의 향수를 잘 버무린 리릭 덕분에 셀레스틱과 에스컬레이드 IQ까지 기대된다.
리릭은 스포츠 단일 트림으로 판매하며 가격은 1억696만원이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