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임러그룹의 역사는 크게 세 명의 인물이 뿌리다. 1834년생인 고틀리프 다임러, 그보다 10년 후에 태어난 칼 벤츠, 그리고 벤츠보다 두 살 어렸던 천재 엔지니어 빌헬름 마이바흐가 주인공이다. 물론 생전에 다임러와 벤츠는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반면 마이바흐와 다임러는 평생의 파트너이자 협력자로 일생을 함께 했다.
그런데 셋 가운데 가장 뒤늦게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빌헬름 마이바흐다. 다임러와 벤츠는 설립자로서 회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마이바흐는 다임러와 공동 창업한 주주였을 뿐 사명에 이름이 들어가지는 않았던 탓이다. 1900년 다임러가 세상을 떠난 후 8년이 지나 두 회사가 합병했고 순리대로 사명은 ‘다임러-벤츠’로 결정됐다. 그리고 칼 벤츠와 빌헬름 마이바흐는 이듬해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 명의 이름은 그룹 내에서 각각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 중 ‘다임러’는 2022년 메르세데스-벤츠로 바뀌기 전까지 ‘그룹명’으로 뚜렷하게 존재했다. 지금은 메르세데스-벤츠그룹이지만 합병 후 100년이 넘는 동안 ‘다임러그룹’으로 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룹명이 바뀌자 ‘다임러’는 상용차 브랜드로 남아 ‘다임러트럭’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그 사이 메르세데스-벤츠는 워낙 강력한 브랜드 인지도 덕분에 승용 브랜드에서 그룹명으로 확장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소비자들이 ‘다임러그룹’은 몰라도 ‘벤츠’를 확실히 인식하자 ‘다임러’를 밀어내고 그룹명을 차지했다. 한 마디로 다임러는 그룹명에서 상용 브랜드로, 벤츠는 승용 브랜드에서 그룹명으로 뒤바뀐 셈이다.
흥미로운 브랜드는 마이바흐다. 마이바흐는 1929년 처음 제품 브랜드로 등장했는데 빌헬름 마이바흐의 공적을 기려 다임러그룹 산하 최고급 승용 브랜드로 출시됐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프리미엄이라면 마이바흐는 그보다 상위 개념의 초고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41년까지 1,800대 정도만 생산되고 제품 브랜드는 사라졌다. 벤츠의 프리미엄 이미지가 강했던 만큼 일종의 브랜드 양보였던 셈이다.
그러다 2002년 60년 만에 마이바흐가 부활했다. 지상 최고급을 겨냥해 벤츠 위의 또 다른 럭셔리가 필요하다고 판단, 마이바흐를 다시 꺼내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워낙 오랜 시간 잠재운 브랜드여서 인지도 확대에 시간이 걸렸던 데다 그 사이 탄탄하게 자리잡은 초창기 고급 경쟁 브랜드가 틈새를 허용하지 않았던 탓이다.
고민하던 메르세데스-벤츠그룹은 마이바흐 부활 작전에 벤츠를 동원했다. 벤츠의 최고급 제품 브랜드로 마이바흐를 활용한 것. 덕분에 메르세데스그룹의 승용 브랜드는 메르세데스-마이바흐와 메르세데스-벤츠 두 가지로 구분되며 각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다임러, 벤츠, 마이바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100년이 넘었지만 이들의 이름만은 여전히 남아 헤리티지를 이어가는 형국이다.
흥미로운 점은 ‘마이바흐’라는 인물의 성정이다. 마이바흐의 어린 시절은 고난했다. 일찍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교육 복지기관에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덕분에 15살 때인 1861년 로이틀링겐 공립 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 12살 많은 고틀리프 다임러다.
다임러는 청년 마이바흐의 엔진 다루는 솜씨에 흠뻑 반했고 곧바로 일을 제안해 ‘세기의 의리’를 끌어냈다. 심지어 결혼도 다임러의 아내였던 에마 쿤츠의 친구와 했을 정도로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평생의 협력자였다. 다임러가 육상, 수상, 항공에 사용되는 소형 고성능 엔진을 의미하는 삼각별 엠블럼을 스케치했을 때 실질적으로 엔진을 만든 인물도 마이바흐다. 스프레이 노즐 카뷰레타를 적용한 4기통 엔진도 마이바흐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메르세데스-벤츠그룹에서 메르세데스-마이바흐의 역할은 초고급 이미지는 물론이고 가장 앞선 혁신 기술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첨단 기술이 먼저 적용되는 브랜드이자 벤츠그룹의 플래그십이기 때문이다. 마이바흐 제품군에 GLS가 추가된 것도 마이바흐 브랜드 확장 전략의 일환이다. 미래에는 메르세데스 벤츠 위의 메르세데스 마이바흐가 메르세데스그룹을 견인한다는 의미다. 제아무리 고급 브랜드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옅어지는 가치는 막을 수 없는 탓이다.
권용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