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변화 반영하면서 로터스만의 가치 보여줘
-마지막 내연기관 로터스라는 점에서 더 가치 있어
자동차를 운전한다기보다는 모터사이클을 다루는 느낌에 가까웠다. 워낙 일체감 있는 느낌이다보니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이다. 가벼운 차체와 직관적인 핸들링,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보여주는 자동차와 운전자가 하나가 된 감각까지. 로터스는 에미라를 통해 내연기관 시대를 마무리하는 한 시대의 마지막 춤을 추고 있었다.
▲디자인&상품성
그동안의 로터스보다 한층 세련된 느낌이다. 이전 제품군이 정통 스포츠카의 느낌을 강조했다면 에미라의 전반적인 실루엣은 이보다 더 호화로운 슈퍼카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렇게 보이는건 유려한 곡선과 공기역학적인 실루엣 때문이다. 브랜드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도 보다 현대적인 느낌과 하이테크적인 감성을 더했다. 날렵한 LED 램프와 대형 공기 흡입구, 그리고 측면의 조각 같은 에어 인테이크는 기능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잡았다.
후면부는 간결하면서도 공격적인 느낌이 돋보인다. 날카롭게 벼려둔 디퓨저와 큼지막한 배기구는 차의 퍼포먼스도 암시해준다. 로터스의 전기 하이퍼카 에바이야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공기 배출구는 차의 성능 그 이상의 것을 연상케 해 시각적인 만족도도 높다.
실내는 기존의 로터스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철저히 운전만을 위한 장비만 갖춰놨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 제법 고급스러운 내장재와 보기 좋은 사이즈의 12.3인치 디지털 클러스터, 10.25인치 센터 디스플레이, 전자식 기어레버까지 제법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편의기능도 예전의 로터스라면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이다. 암레스트에는 12V 시거잭과 USB 포트를 마련했고 유·무선 애플 카플레이나 안드로이드 오토를 쓸 수 있다. 열선시트와 주행 모드 다이얼, 후방 카메라 등 일상에서 필요할 법한 품목들도 갖추고 있어 데일리 스포츠카로 쓰기에도 손색 없겠다.
수납 공간은 시트 뒤쪽(208ℓ)과 후방 엔진룸(151ℓ)에 마련되어 있다. SUV나 해치백처럼 큰 짐을 적재할 수는 없겠지만 일상적으로 들고 다니는 가방이나 마트에서 구입한 식료품 봉투 몇 개 정도는 거뜬히 적재할 수 있다. 적재 공간이 불만이라 말할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이 같은 구성은 대부분의 미드십 스포츠카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성능
메르세데스-AMG로부터 공급받은 2.0ℓ 4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을 미드십으로 얹고 여기에 8단 듀얼클러치 변속기(DCT)를 조합했다. 최고출력은 364마력, 최대토크는 43.9㎏∙m이다. 인상적인 출력이 아니라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공차중량은 1,455㎏ 불과하다. 국산 준중형차와 비슷한 무게이니 300마력 후반대의 출력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중대한 결단을 해야 누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빨간 커버를 열어 시동 버튼에 힘을 줬다. 엔진의 응답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AMG의 거칠고 폭발적인 성향과는 다르다. 로터스는 이 엔진을 마치 자연흡기 엔진처럼 반응하도록 다듬었다. 스로틀을 열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힘은 점진적으로 올라오며 지속적인 펀치력으로 고회전대를 유지하며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가속감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터보 엔진에서 흔하게 느낄 수 있는 급격히 쏟아져나오는 토크가 아닌, 운전자가 원하는 만큼 정확한 힘을 뽑아낼 수 있도록 조율된 느낌이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움직임 뿐만이 아니라 파워트레인의 응답성까지 철저히 일체감 있게 움직인다는건 에미라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스포츠카의 많은 섀시 제어 기술과 스티어링 조작 방식이 각종 전자제어 장비와 전동식 모터 등으로 정제된 감각을 제공하는 시대다. 반면 에미라는 날것 그대로다. 가볍게 조향할 수 있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다. 아주 미세한 조작에도 차체는 지체없이 방향을 바꾸고 타이어가 노면을 꽉 쥐고 있는 느낌이 손끝에 그대로 전달된다. 자동차가 또 하나의 내가 된 느낌을 준다.
스티어링을 이리 저리 돌리다보면 에미라에서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느낀다. 사실 수치만으로 보면 더 강력한 성능을 내는 에미라 V6도 있고 경쟁차에는 더 높은 출력을 내는 차도 있다. 하지만 로터스는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가 보다는 얼마나 '재미있게' 달리는가가 더 중요한 차다.
스티어링을 돌리는 순간 앞머리가 가볍게 반응하고 차체의 균형이 섬세하게 변한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리어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움직임은 마치 한계를 향해 나아가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불안정함이 아니라 운전자가 리어를 조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세팅. 덕분에 코너 하나하나가 단순한 주행이 아니라 하나의 게임 처럼 느껴진다.
미드십 스포츠카의 백미는 단연 와인딩 로드에서 느껴진다.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가벼운 앞머리 덕에 차체는 망설임 없이 이곳 저곳을 향한다. 오르막에서 자연스레 뒤쪽으로 흘러간 무게 중심은 뒷바퀴를 꽉 눌러 주며 코너링 궤적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다시 가속페달을 꽉 밟으면 흡기가 열리며 바람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이내 속도는 높아지고 리어에서 오는 피드백이 점점 짜릿해진다. 마치 한계로 달려가면 뒷바퀴가 자연스럽게 흐를 것 같은 감각. 하지만 이 움직임은 불안함이 아니다. 운전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총평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에미라는 로터스가 내놓은 마지막 내연기관 스포츠카다. 앞으로 로터스는 전기차로 거듭날 예정이고 더 빠르고 효율적이며 친환경적인 브랜드로 거듭난다. 그래서 더 여운이 짙게 남는다. 순수한 기계가 전해줄 수 있는 마지막 감각, 다분히 로터스 다운 느낌을 오롯이 녹여내서다.
에미라는 스로틀을 밟을 때 마다 흡기가 열리고 터보차저가 돌면서 엔진이 리듬을 맞추며 화려한 마지막 춤을 선사한다. 속도가 오를수록, 리어가 가벼워질수록, 한계에서 조작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이 차는 운전자에게 ‘이 순간을 즐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마지막 내연기관 로터스를 이렇게 보낸다. 뜨겁고 짜릿한 감각을 남긴 채, 에미라는 그렇게 떠나간다. 로터스의 화려한 라스트 댄스에 뜨거운 안녕을 보낸다.
시승한 에미라 L4 DCT의 가격은 1억4,990만원이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