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부터 100년 가까이 숫자 체계 고집
-숫자, 문화권 차이 없이 일관된 해석 가능
-3008, 이 같은 일관성에 '파격' 담아내
자동차의 이름은 단순한 식별 수단을 넘어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다. 감성을 자극하는 단어를 쓰기도, 창업자나 도시의 이름을 따오기도 한다.
그런데 푸조는 조금 다르다. 오직 숫자만으로 자신들을 소개해왔다. 세 자리 혹은 네 자리 숫자 속에 자동차의 성격과 세대를 답는 푸조의 네이밍은 언뜻 단순해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은 가장 정교한 언어 중 하나로 100년 가까이 그 정교함을 쌓아왔다.
푸조의 숫자 네이밍은 192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푸조가 대량 생산을 시작한 첫 차 '201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이 때 부터 푸조는 가운데에 '0'을 넣은 세 자리 숫자 체계를 도입했고 이후로도 모든 양산차에 이를 일관되게 적용해왔다.
이 조합에는 명확한 규칙이 있다. 가운데 자리의 '0'은 차종을 구분하는 상징이고 앞자리는 차의 크기나 세그먼트를, 뒷자리는 해당 제품의 세대를 뜻한다. 예를 들어 208, 308, 508은 각각 소형·준중형·중형 세단 또는 해치백을 의미하며 2008, 3008, 5008은 SUV 계열을 뜻한다.
SUV 시장 확대에 따라 ‘00’을 가운데 넣은 4자리 네이밍도 생겨났고 세대 변경 없이 파워트레인이나 스타일만 바뀌는 경우에는 뒷자리를 '8'로 고정하는 방식도 쓰고 있다. 이런 구조 덕분에 푸조의 모든 차는 이름만 들어도 어느 정도의 크기와 포지션, 그리고 히스토리를 가늠할 수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소위 아라비아 숫자를 쓰는 문화권이라면 언어와 문화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오해의 소지도 적다. 푸조는 이 단순함의 힘을 일찍이 간파했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정착시켰다.
이 고집스러운 일관성은 1960년대 포르쉐와의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포르쉐는 신차의 이름에 '901'이라는 이름을 달고자 했다. 그러나 푸조는 가운데에 0이 들어간 세 자리 숫자에 대한 상표권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렇게 태어나기도 전 부터 이름을 바꿔야 했던 '포르쉐 901'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르쉐 911'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이런 푸조의 철학은 신차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달 국내 출시를 앞둔 '3008 스마트 하이브리드'다. 이름만 봐도 준중형 SUV 라인업의 세 번째 세대임을 알 수 있다. 2008년 처음 등장해 2016년 2세대를 거쳐 이번에 3세대로 완전 변경된 제품이다.
이번 3008은 기존의 SUV 스타일에서 벗어나 모던한 패스트백 실루엣으로 대변신을 시도했다. 여기에 푸조 최초의 3세대 파노라믹 아이콕핏을 적용해 미래적인 감각을 더했다. 실내는 간결하지만 세련됐고 직관적인 조작계와 증강현실 기반 HUD, 21인치 와이드 스크린이 조화를 이룬다.
파워트레인은 스마트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적용됐다. 기존 가솔린 엔진에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기술을 접목한 방식으로 전기 모터가 가속과 회생 제동, 저속 주행을 보조한다. 덕분에 효율은 높아졌고 탄소 배출량도 감소했다. 전동화 전환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 시장에서 푸조가 내놓은 과도기적 해법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출시 6개월 만에 10만대 이상이 팔렸다. 현지 언론들은 3008을 두고 "패밀리 SUV에 쿠페의 날렵함을 더한 세련된 패스트백", "독일차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조작이 직관적"이라며 호평 일색이다.
단순함은 지루함이 아니다. 깊은 사고와 원칙에서 비롯된다. 푸조는 숫자라는 가장 단순한 언어로 자동차를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100년을 넘는 고유의 가치와 집념이 녹아 있다. 이 숫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 볼 때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