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GR 히스토리 ①] 고독한 도련님과 중고 알테자

입력 2025년07월22일 08시25분 박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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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타시 모토마치 공장. 이곳은 토요타의 자존심과도 같은 차 크라운이 만들어지는 당대 일본 기술의 결정체였다. 1984년 4월. 토요타자동차에 갓 입사한 토요다 아키오는 이곳에서 경리 일을 시작으로 생산, 조사, 상품기획까지. 숱한 부서를 거치며 일했다. 그러나 그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는 '도련님' 이라는 사실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누구에게도 '토요타의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어깨 위엔 창업자의 3세라는 족쇄가 있었고 언젠가 회사를 물려받게 될 인물 정도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모의 비호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토요다 쇼이치로는 "여기에서 너를 상사로 모시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특별 대우를 받을 생각은 마라"며 늘 불호령이었다. 

 

 그렇게 조직을 겉돌던 그는 인생을 바꾼 한 사람과 마주한다. 토요타 전설의 테스트 드라이버 나루세 히로무. 그는 토요다 아키오가 누구인지를 따지지 않았다. "운전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말만 많지, 우린 목숨 걸고 테스트한다"고 쏘아붙였다. 

 

 "저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십시오."

 

 입사 2년차였던 토요다 아키오는 나루세 히로무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그날부터 혹독한 교습이 시작됐다. 회사 안에서도 일부만 들어갈 수 있다는 테스트 드라이버 부서 ‘N팀’에 끼어 차가 어떻게 달리는지를 처음부터 배웠다. 도면에도, 수치에도 잡히지 않는 차의 감성, 손끝으로 올라오는 진동, 조향의 무게감을 느끼며 그는 자동차 마니아가 되어갔다. 

 


 

 2001년. 나루세는 그에게 더 큰 무대 뉘르부르크링을 권유한다. 유럽 자동차의 성지, 독일의 ‘녹색 지옥’이라 불리는 서킷. 한 번도 간 적 없는 곳이었다.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근질거렸다. 운전자가 되고 싶다면, 진짜 차를 만들고 싶다면, 그곳에서 배워야 했다.

 

 그렇게 2007년, 아키오는 직접 라이선스를 땄다. 일본 국내 경주에 출전해 C 라이선스를 획득하고 팀을 꾸려 독일로 향했다. 자동차 회사의 이름은 달지 못했다. 아직 누구도 그를 정식 드라이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6월 10일,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 레이스. 토요다 아키오 당시 부사장은 가면을 썼다. ‘모리조(MORIZO)’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회사 이름도 내걸지 못한, 이 ‘조용한 도전’은 팀 가주(Team GAZOO)라는 이름으로 치러졌다. 1990년대 토요다 아키오 주도 하에 만든 중고차 정보 웹사이트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경기차는 토요타 알테자(1세대 렉서스 IS)였다. 이미 단종된 평범한 일본 세단이었다. 창업주의 손자가 이끄는 팀이었지만 본인의 이름은 물론 회사의 이름조차 달지 않았고 차는 회사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비로 구입한 중고 주변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모리조에게 뉘르부르크링은 고독했다. 거대한 브랜드의 후계자가 아니라 가면을 쓴 한 무명의 드라이버로 서킷을 돌았다. 토요타는 이 레이스를 공식 홍보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말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달리기만 했을 뿐이다. 서킷은 가혹했고, 차는 수차례 고장 났으며, 팀원들은 낮과 밤을 번갈아 가며 엔진을 뜯었다.

 

 하지만 모리조는 달렸다. 그리고 완주했다. 누구도 환호하지 않았지만 그 밤은 토요타의 역사에 남았다. 그리고 이 경험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차의 맛은 설계에 없다. 달려봐야, 흔들려봐야, 깨져봐야 안다”고 생각하는 그의 시각도 이 때 나왔다. 

 

 도련님이라 불리던 사내가 회사 이름도 없이 중고차를 몰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서킷을 완주한 그 순간 토요타 가주 레이싱은 그렇게 시작됐다. (2부에서 계속)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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