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앞에 뒤집히는 전략
-정체성은 유지하되 핵심은 중국화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 의해 형성돼 왔다."
팀 마샬이 저술한 사회학 서적 '지리의 힘(The Power of Geography)' 서문에는 각 국가나 세력의 힘은 언제나 지리적 특성에 기원했다는 책의 맥락을 관통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바둑에서 초반 포석이 판을 좌우하고 체스에서는 중앙을 점령하는 수 싸움이 핵심이며, 하다하다 스타크래프트에서 멀티가 승패를 가르듯 소위 '맵 장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오늘날 자동차 산업이 겪고 있는 격변도 이 '맵의 재편'에서 비롯된다. 한때 자동차 기술의 중심지는 디트로이트, 스투트가르트, 나고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주도권은 상하이, 선전, 우한 같은 이름으로 대체되고 있다. 중국이 좋건 싫건의 문제를 떠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분명한 현실이다.
포드는 이 변화에 가장 솔직했다. 짐 팔리 포드 CEO는 "이제 GM이나 토요타가 아닌 BYD와 지리 같은 중국 기업들을 경쟁 상대로 보고 있다"고 선언하고 공급망과 제조 방식을 전면 재구성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전략 조정을 넘어 기술과 생산의 개념까지 바꾸겠다는 걸 암시한 대목이다.
아우디는 더 급진적인 선택을 했다. 중국 시장에서 네 개의 링 대신 'AUDI' 레터링을 쓰는 중국 전용 브랜드를 신설했다. 전기 구동계와 인포테인먼트까지 모두 현지 소비자 감성에 맞췄고 기술과 생산 전반은 합작 파트너인 상하이자동차(SAIC)의 주도 하에 이뤄진다. 브랜드의 외피는 그대로지만 그 속은 모두 중국에 맞춰지고 있는 셈이다.
토요타도 현지 전략을 수정했다.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 전념해왔던 기존의 자존심을 내려두고 중국에서만큼은 많은 부분을 현지에 할애했다. 자율주행 기술은 현지 스타트업 모멘타와 함께 개발하고 있고 인포테인먼트와 PE시스템 등은 화웨이에게 맡기는 식이다. 그렇게 중국 현지에서 생산 및 판매되고 있는 bZ 시리즈 전기차는 로고만 토요타를 달고 있을 뿐 핵심은 중국 생태계에 맞췄다.
이 세 브랜드의 전략을 요약하면 한 가지 공통점으로 귀결된다. 정체성은 유지하되, 핵심은 중국화하고 있다는 것. 포드는 구조를 바꾸고자 하고, 아우디는 껍데기를 새로 썼으며, 토요타는 기술의 일부를 외부에 위탁했다. 각기 다른 접근법 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같다. ‘어떻게 중국에서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법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중국일까. 단지 시장 규모가 커서만은 아니다. 중국은 원자재, 배터리, 전장부품, 충전 인프라, 생산기지, 인력, AI, 소프트웨어 생태계까지 모든 밸류체인을 한 국가 안에 보유한 나라다. 기술을 설계하고 생산까지 독립적으로 완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은 단순한 판매처가 아니라 산업 기반 그 자체가 된다.
이는 지리의 힘에서 팀 마샬이 반복해서 말하는 ‘물리적 지형이 만들어낸 전략적 우위’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중국은 지형적으로 자국 내 자원 확보가 가능한 데다, 내륙은 제조, 해안은 수출입에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리적 특성과 인구, 정책, 기술 인프라가 결합된 지정학적 결정체로서의 중국은, 단순히 대체 가능한 파트너가 아니다.
유사한 예는 스마트폰 산업에서 볼 수 있다. 애플과 폭스콘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설계된 아이폰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건 중국의 공급망과 인력, 생산 속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동차 산업이 맞이하고 있는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술과 자존심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어디서, 누구와 함께 기술을 실현할 수 있느냐가 산업의 승패를 가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흐름은 역사의 반복이기도 하다. 화약은 중국에서 발명됐지만 그것을 근대 전쟁의 무기로 체계화하고 세계를 제패한 건 유럽이었다. 기술의 기원이 동양에 있었다 해도 그 기술을 산업화하고 전략화한 쪽은 서양이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이제는 반대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자동차는 분명 서양이 만든 문명이었다. 독일은 내연기관을, 미국은 대량생산 방식을, 일본은 품질과 효율을 전 세계에 수출했다. 그리고 중국은 그 모든걸 빨아들이고자 하고 있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