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와 우박, 캠핑과 레이스가 뒤섞인 ‘녹색지옥’의 밤
아이펠 산맥 인근의 뉘르부르크링 일대. 독일 서부 국경 지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오랫동안 화산 지형과 척박한 산악 환경으로 유명했고 1·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독일과 프랑스, 벨기에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지금도 이 일대 숲과 산길 곳곳에는 전쟁 당시 흔적과 오래된 군사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20년대 독일 정부, 그러니까 바이마르공화국 당시 이 척박한 지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추진한 대규모 공공사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뉘르부르크링이었다. 당시 독일은 자동차 산업 육성과 실업 문제 해결이라는 두 가지 목적 아래 산악 지형을 따라 거대한 서킷 건설에 나섰고 그렇게 1927년 문을 연 뉘르부르크링은 점차 독일 자동차 산업의 상징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때 전쟁과 군사적 긴장감이 감돌던 이곳은 이제 전 세계 자동차 팬들이 모여드는 ‘모터스포츠 성지'가 됐다. 그리고 폭스바겐은 이곳에서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와 연계된 'GTI 빌리지 2026'에 참가해 폭스바겐의 퍼포먼스 헤리티지와 팬 문화를 소개했다.
실제로 현장 분위기는 일반적인 미디어 행사와는 완전히 달랐다. 5월 14일부터 열린 GTI 빌리지는 말 그대로 GTI 팬들을 위한 거대한 축제였다. GP 구간에서 노트르슐라이페로 향하는 직선구간 바로 앞 언덕에 조성된 GTI 빌리지에는 캐빈형 숙소와 라운지, 전시 공간,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함께 운영됐다.
체크인 순간부터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호텔 로비 대신 맞이한 건 컨테이너 형태의 작은 숙소들이었다. 샤워장과 화장실은 공용 시설을 이용해야 했고 숙소 주변은 흙길과 자갈밭이 이어졌다. 마치 캠핑 사이트에 들어온 느낌. 서킷 옆 작은 캐빈에서 3박 4일을 보내며 우리 역시 자연스럽게 이 문화 속으로 녹아드는 경험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라운지로 올라오니 GTI 일색이다. 역대 GTI를 한 눈에 볼 수 있는건 물론 팬 커뮤니티 토크와 레이싱 드라이버 미팅 같은 프로그램도 이어졌다. 각종 체험 프로그램도 상당히 인상적. 특히 기억에 남는 건 GTI 50 튜닝 프로젝트였다. 참가자들이 직접 튜닝 작업 과정에 참여하고 완성 중인 차의 보닛 위에 자신의 서명을 남길 수 있도록 구성된 이벤트였다. 단순히 차를 전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특별한 GTI’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만든 셈이다.
폭스바겐은 이번 행사에서 GTI의 과거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래를 더 강하게 드러냈다. 행사의 핵심 이벤트는 ‘ID. 폴로 GTI’ 월드 프리미어였다. 폭스바겐은 뉘르부르크링 한복판에서 GTI 역사상 처음으로 순수 전기 GTI를 공개했다. 전동화 시대에도 GTI라는 이름을 유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동시에 폭스바겐은 내연기관 퍼포먼스 역시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링 불러바드 한가운데에는 ‘골프 R 24H’ 쇼카가 전시됐다. 2027년 뉘르부르크링 24시 출전을 예고한 차다. 낮게 깔린 차체와 거대한 리어윙, 넓어진 펜더는 “양산형 골프 기반 레이스카”라는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공격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폭스바겐은 브랜드 출범 25주년이 되는 2027년, 골프 R 기반 사륜구동 레이스카로 뉘르부르크링 24시에 출전할 계획이다.
올해 뉘르부르크링 24시는 그 어느 때보다 화제를 모았다. 레드불 소속 포뮬러원(F1) 드라이버 막스 베르스타펜의 출전 때문이다. 실제로 현장 티켓은 일찌감치 전량 매진됐고, 뉘르부르크링 일대 교통 체증은 상상 이상이었다. 취재진을 위해 준비된 미디어 셔틀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 결국 노르트슐라이페 일대를 직접 걸어 이동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직접 걸어다니며 본 풍경들이 오히려 뉘르부르크링이라는 공간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다만 날씨는 ‘엉망진창’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한반도보다 높이 있는 곳이라 해는 밤 9시에나 떨어졌고 새벽에는 숙소 천장을 때리는 우박과 천둥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런데 몇 시간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햇빛이 비췄다. 취재진 입장에서도 정신없는 환경이었는데 실제 레이스를 뛰는 드라이버들과 엔지니어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여기서는 타이어 전략이 아무 의미 없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팀 컨트롤타워가 위치한 구간은 맑은데, 정작 노르트슐라이페 특정 구간에는 비가 내리는 상황이 흔하다는 것. 예측을 믿고 슬릭 타이어를 선택했다가 갑자기 젖은 노면을 만나 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히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예선 주행이 모두 끝나고 저녁 주행이 없는 둘째날 밤. 주최측은 노르트슐라이페를 관람객에게 열었다. 트랙워크. 이 이벤트는 정말 잊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킷 중 하나인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를 직접 걸어본다는 것 자체가 묘한 감정을 만들었다.
더 재밌었던 건 주변 분위기였다. 인근 캠핑 사이트의 관람객들은 트랙 워크 참가자들에게 음악을 틀어주고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는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트랙을 ‘질주’했고, 그러다 넘어져 팔꿈치가 까지고 바지가 찢어졌는데도 웃으며 다시 달려갔다. 한켠에서는 공을 차고 노는 어린아이들과 트랙 바닥에 누워 맥주를 마시는 이들이 엉켜 재밋는 풍경을 만들었다.
우리였다면 위험하다고 말릴 상황이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고 유쾌한 축제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자동차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수만 명이 같은 공간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셋째 날, 본 레이스가 시작되자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낮부터 서킷 전체의 열기가 눈에 띄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GTI 빌리지 곳곳에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캠핑 사이트마다 음악과 바비큐 냄새, 엔진음이 뒤섞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폭스바겐 측이 이례적으로 이른 오후부터 맥주를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단순한 브랜드 행사라기보다 '이제 진짜 레이스가 시작된다'는 축제 선언처럼 느껴졌다.
저녁이 되자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트랙을 달리는 골프 GTI 클럽스포트 24h를 응원했다. 누군가는 독일 맥주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와인을 마셨다. 여기저기서 커리부어스트 냄새가 풍겨왔다. 캠핑 의자에 앉아 차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폭스바겐 차가 지나갈 때마다 환호했고 헤드라이트가 어둠 속을 가르며 지나갈 때면 박수와 함성이 이어졌다.
그 모습들을 보며 이들이 왜 뉘르부르크링을 사랑하는지, 왜 모터스포츠를 인생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왜 폭스바겐 GTI라는 이름에 열광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잠시 시끄러운 음악과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동료 기자를 따라 숙소 인근의 어두운 구역으로 걸어 나갔을 때였다. 밤하늘 위로는 구름 사이의 별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추위는 꽤 매서웠지만 바로 눈앞에서 레이스카들이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질주해 나가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레이스카 몇대가 지나가는지도 모르며 잔도 없이 와인을 병째 들이키는 것 자체가 묘한 낭만처럼 느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뉘르부르크링은 단순히 가장 험한 서킷이 아니라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드는 거대한 놀이터에 가깝다고. 1976년 등장한 작은 해치백 하나가 반세기 동안 이어져 이런 문화를 만들었다는 사실 역시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폭스바겐은 이번 행사 내내 GTI를 단순한 차가 아니라 “운전의 즐거움”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뉘르부르크링에서 보낸 3박 4일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단어 역시 기록이나 출력이 아니었다.
즐거움. 그건 50년을 달려온 폭스바겐 골프 GTI에게도, 전쟁의 흔적 위에 모터스포츠 문화를 꽃피운 뉘르부르크링에게도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처럼 느껴졌다.
뉘르부르크(독일)=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