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중형차 넘어선 크기와 풍부한 편의품목
-저속에서는 단단하지만 속도 붙을수록 안정적
-가솔린 인스퍼레이션 3,152만원..첫 차의 의미는 희미
연암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에는 가난한 양반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그 신분을 사려는 부자가 등장한다. 양반이라는 이름만 얻으면 자신도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양반이라는 이름과 실체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이름만으로 사람의 지위와 가치를 나누던 시대의 질서를 맹렬히 풍자한 장면이다.
자동차의 차급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무엇이 준중형차를 준중형차 답게 만들까. 차체 크기일까, 배기량일까, 가격일까, 아니면 차에 붙은 이름일까. 아반떼를 마주하면 이 질문이 한층 복잡해진다. 전장 4,765㎜, 전폭 1,855㎜, 휠베이스 2,750㎜로 과거 EF쏘나타와 NF쏘나타에 견줄 만큼 커졌다. 너비와 휠베이스는 이들을 넘어선다. 한때 중형 세단을 상징했던 2.0ℓ 가솔린 엔진도 품었다. 이름은 아반떼지만 체격과 품새는 우리가 기억하던 준중형차의 범위를 이미 벗어났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반떼는 어느 차급에 속하는 차일까. 누군가의 첫 차이자 가장 보편적인 국민 세단이라는 오랜 역할은 여전히 유효할까.
▲디자인&상품성
외관에서는 커진 차체를 숨기기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기존 아반떼(CN7)보다 길이는 55㎜ 늘었고 너비와 휠베이스도 각각 30㎜ 확장됐다. 긴 후드와 짧아 보이는 앞뒤 오버행, 힘껏 부풀린 펜더를 조합해 정통 세단의 비례를 유지하면서도 한층 역동적인 자세를 완성했다.
차체 앞뒤 모서리를 사선으로 다듬고 램프를 안쪽으로 끌어들인 덕분에 실제 크기보다 오버행이 짧아 보인다. 측면에는 여러 선과 면이 교차한다. 이전 세대가 보여준 날카로운 조형을 계승하면서도 펜더의 볼륨과 차체의 양감을 한층 강조했다. 정면에서는 넓고 낮게 깔려 있고 뒤에서는 좌우로 단단히 벌어진 모습이다. 체격만 커진 준중형차보다 한 체급 위 스포츠 세단에 가깝다.
실내에서도 차급의 경계가 흐려진다. 도어 암레스트와 센터콘솔은 운전자를 감싸는 형태로 배치했고 더블 D컷 스티어링 휠로 스포티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중앙에는 14.6인치 또는 12.9인치 디스플레이를 기반으로 한 플레오스 커넥트가 자리하고 운전자 앞에는 9.9인치 슬림 디스플레이를 별도로 배치했다.
화면이 커졌다고 모든 기능을 디스플레이 안에 밀어 넣지는 않았다. 공조장치와 비상등 등 자주 사용하는 기능은 물리 버튼으로 남겼다. 디지털 환경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운전 중 조작성을 놓치지 않으려 한 구성이다.
플레오스 커넥트는 기존 현대차 인포테인먼트와 화면 구성 및 조작 체계가 달라 처음에는 다소 낯설다. 원하는 기능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 몇 차례 화면을 오가게 된다. 대신 생성형 인공지능 에이전트 ‘글레오’가 이 간극을 상당 부분 메운다.
“내비게이션 안내 음량을 꺼줘”라고 말하면 곧바로 소리를 줄이고 창문을 여닫거나 실내 온도를 조절하는 명령도 자연스럽게 수행한다. 차의 기능 대부분을 음성으로 제어할 수 있어 복잡한 메뉴를 일일이 찾아 들어갈 일이 줄었다. 인터페이스를 익히기보다 원하는 행동을 말하면 된다는 점에서 플레오스 커넥트가 지향하는 사용 방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간은 사실상 과거 중형차 수준이다. 휠베이스가 2,750㎜로 늘어난 데다 1열 시트 두께와 좌석 배치를 다듬어 2열 무릎 공간과 머리 공간 모두 여유롭다. 479ℓ의 트렁크 역시 가족용으로 부족하지 않다. 적재 공간의 위아래 열림 폭을 475㎜까지 넓혀 유모차나 부피가 큰 짐을 넣고 빼기도 수월하다.
안전·편의품목도 풍부하다. 10에어백과 페달 오조작 안전 보조, 차로 유지 보조 2,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워크 어웨이 락 등이 기본 적용된다.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2와 기억 후진 보조, 서라운드 뷰 모니터, 원격 스마트 주차 보조 등도 마련했다.
특히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은 고속도로나 자동차 전용도로뿐 아니라 일반도로에서도 과속방지턱과 교차로 등 특정 구간을 인식해 속도를 조절한다. 아반떼가 단순한 엔트리 세단을 넘어 현대차의 최신 기술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능
시승차는 2.0 가솔린으로 최고출력 149마력, 최대 18.3㎏·m를 발휘한다. 동력을 전달하는건 무단변속기인 IVT. 아반떼가 2.0이라니. 배기량만 놓고 보면 한때 중형 세단의 공식과도 같은 조합이다.
다만 배기량에서 연상되는 여유와 달리 성격은 철저히 일상에 맞춰져 있다. 출발과 동시에 힘을 과시하기보다 부드럽게 속도를 붙이고 운전자가 요구하는 만큼 꾸준히 힘을 꺼내 쓴다. 폭발적인 가속과는 거리가 있지만 도심과 고속도로를 오가는 데 부족함은 없다.
IVT도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엔진 회전수를 먼저 끌어올리는 무단변속기 특유의 반응이 나타나지만 일상적인 주행에서는 엔진을 효율적인 회전 영역에 묶어두며 자연스럽게 속도를 높인다. 가속감보다 부드러움과 효율에 무게를 둔 조합이다.
첫인상은 단단하다. 저속으로 도심의 잘게 파인 노면이나 연속된 요철을 통과하면 노면의 질감이 비교적 또렷하게 전해진다. 최근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탄탄한 승차감과 스포티한 주행 감각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다만 아반떼가 특정 취향을 가진 운전자보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는 차라는 점을 생각하면 호불호가 나뉠 여지도 있다. 운전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차체를 단단히 붙잡는 감각으로 다가오지만 부드럽고 편안한 승차감을 기대한 소비자에게는 다소 뻣뻣하게 느껴질 수 있다.
평가는 속도가 붙으면서 달라진다. 차체가 노면에 착 가라앉으며 오히려 승차감이 좋아진다. 고속도로의 완만한 굴곡을 지나거나 빠르게 차선을 바꿀 때 불필요한 상하 움직임이 적다. 한 차례 자세를 바꾼 뒤 곧바로 균형을 되찾는다. 저속에서 느껴졌던 단단함이 중고속 영역에서는 안정감으로 바뀌는 설정이다.
과속방지턱이나 교량과 도로가 만나는 연결부처럼 짧고 큰 충격이 들어오는 구간의 움직임도 깔끔하다. 차체가 한 차례 움직인 뒤 여진 없이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는다. 토션빔 방식의 후륜 서스펜션에서 종종 나타나는 짧은 스트로크와 ‘꽝’ 하고 떨어지는 듯한 충격도 상당히 억제했다.
단순히 토션빔의 한계를 감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주어진 구조 안에서 충격의 크기와 차체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나눠 조율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특히 요철을 넘은 뒤 차체가 불필요하게 출렁이지 않는 모습에서 개발진이 공을 들인 흔적이 드러난다.
스티어링 휠의 응답도 즉각적이다. 운전자가 방향을 틀면 앞머리가 지체 없이 반응하고 뒤쪽도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온다. 중심 부근의 감각이 과도하게 가볍지 않고 속도가 높아질수록 무게감이 자연스럽게 더해진다. 일상용 세단이지만 운전 재미를 이야기할 만하다.
정숙성도 좋아졌다. 윈드쉴드와 전석 도어에 이중접합 차음 유리를 적용하고 차체 곳곳의 흡차음재와 실링 구조를 보강했다. 고속에서도 풍절음과 외부 소음의 유입이 크지 않으며 엔진음 역시 필요한 만큼만 실내로 들어온다. 모든 소리를 무작정 지웠다기보다 각각의 음이 거슬리지 않도록 조율한 느낌에 가깝다.
연료 효율은 예상보다 뛰어났다. 공인 복합효율은 14.3㎞/ℓ지만 영종도와 일산을 오간 시승에서는 계기판이 17~18㎞/ℓ를 가리켰다. 주행의 대부분이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2.0ℓ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을 얹은 차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상적인 수치다.
▲총평
'양반전'이 보여준 것은 이름과 실체가 어긋난 사회였다. 양반이라는 명칭을 가졌지만 그에 걸맞은 능력과 책임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었고 이름은 없어도 더 큰 경제력을 지닌 사람이 존재했다.
신형 아반떼도 자동차의 차급 질서를 흔든다. 준중형 세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크기와 공간, 정숙성, 편의품목은 과거 중형차를 넘어선다. 고속에서 차분하게 가라앉는 움직임과 즉각적인 조향 반응에서도 엔트리 세단 특유의 가벼움은 찾기 어렵다. 차급을 이름이 아닌 실체로 판단한다면 지금의 아반떼를 단순한 준중형차로 분류하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이름과 실체의 간격이 가격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가솔린 2.0은 모던 2,398만원에서 시작하지만 시승차와 같은 인스퍼레이션은 3,152만원이다. 아반떼라는 이름은 여전히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마련했던 첫 차를 떠올리게 하지만 가격표는 더 이상 가볍지 않다.
아반떼는 오랫동안 잘 만든 작은 차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누군가에게는 첫 월급으로 계약한 차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결혼과 함께 마련한 첫 가족용 세단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현실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꿈꿀 수 있었다는 점이 아반떼를 국민차로 만들었다.
박지원이 양반의 실체를 물었듯 새 아반떼도 차급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과거 중형차보다 커진 아반떼를 여전히 준중형차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반대로 3,000만원을 넘어선 아반떼를 예전처럼 국민의 첫 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름은 여전히 아반떼다. 그러나 체격과 품새, 그리고 몸값은 이미 다른 계급에 도착해 있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