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3열과 풍부한 편의품목 돋보여
-미국식 고급감과 지프 본연의 주행 능력 조화
자동차를 고르는 과정에는 일종의 공식이 존재한다. 특히 3열을 갖춘 6인승 SUV를 찾는다면 선택지는 더욱 명확해진다. 합리적인 국산 준대형 SUV를 먼저 살펴보고 예산에 여유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로 시선을 옮긴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의외의 선택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지프 그랜드 체로키 L이다.
처음에는 지프라는 이름 때문에 오프로드 성능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실제로 그랜드 체로키 L은 험로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차다. 하지만 며칠간 차와 함께하면서 더 크게 다가온 매력은 따로 있었다. 넉넉한 3열과 풍부한 편의품목, 고급 소재를 아낌없이 사용한 실내, 부드러운 승차감까지 패밀리 SUV가 갖춰야 할 조건을 예상보다 훨씬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제대로 들여다보면 6인승 SUV 시장의 숨은 보석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미국 SUV다운 당당한 존재감
첫인상은 미국 SUV답게 듬직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하기보다는 강인한 직선과 반듯한 면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네모반듯한 7슬롯 그릴을 중심으로 적당한 크기의 헤드램프와 범퍼 양쪽 에어덕트를 배치해 지프 특유의 단단한 인상을 완성한다.
측면에서는 그랜드 체로키 L의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긴 휠베이스와 3열까지 시원하게 뻗은 유리창이 상당한 크기의 SUV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반듯하게 이어지는 벨트라인과 캐릭터 라인, 절도 있게 떨어지는 D필러 역시 차를 실제 크기보다 더욱 길고 안정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과거 지프 플래그십 SUV에서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의 흔적도 은근히 느껴진다. 국내에는 판매하지 않는 한 체급 위 왜고니어와 일정 부분 디자인 언어를 공유한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단순히 그랜드 체로키의 차체만 길게 늘인 듯한 모습이 아니라 지프 대형 SUV만의 당당한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
반면 뒷모습은 의외로 섬세하다. 얇게 다듬은 테일램프와 군더더기 없이 정리한 테일게이트,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은 레터링이 깔끔한 인상을 만든다. 범퍼 역시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꾸미지 않았다. 거대한 차체를 가졌지만 뒤에서 바라봤을 때 부담스럽거나 우락부락하지 않다. 덕분에 패밀리 SUV로서 한층 친근하게 다가온다.
▲진짜 매력은 문을 열었을 때 드러난다
그랜드 체로키 L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단연 실내다. 특히, 6인승 SUV의 본질인 공간 활용에서 상당한 실력을 보여준다. 긴 차체를 바탕으로 1·2·3열 사이 간격을 절묘하게 나눴다. 2열은 예상대로 넉넉하고 3열 역시 구색 맞추기에 머물지 않는다. 시트 포지션을 적절하게 설정해 앉았을 때 답답함이 적고 커다란 측면 유리 덕분에 개방감도 훌륭하다. 성인이 앉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공간이 나온다.
이 부분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상당수 3열 SUV가 좌석 숫자를 늘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마지막 열은 비상용 공간에 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 그랜드 체로키 L은 3열 탑승자까지 하나의 가족 구성원으로 바라본 흔적이 역력하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서로 막힘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장거리 이동에서도 특정 탑승자만 희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편의품목을 살펴보면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실해진다. 이렇다 할 하나의 화려한 기능으로 시선을 끄는 방식이 아니다. 대신 6명이 실제로 차를 이용할 때 필요한 기능을 꼼꼼하게 채워 넣었다. 대표적으로 2열 중앙의 컵홀더와 수납공간은 앞뒤 양쪽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덕분에 2열뿐 아니라 3열 탑승자도 편하게 활용할 수 있다. 도어 안쪽 수납공간도 넉넉하고 독립 공조장치와 송풍구를 비롯해 열선 및 통풍 기능까지 빠짐없이 챙겼다. 커다란 측면 유리를 가릴 수 있는 햇빛가리개도 마련했다.
머리 위로는 거대한 파노라마 선루프가 펼쳐진다. 기본적으로 넓은 실내에 시각적인 여유까지 더하면서 대형 SUV 특유의 개방감을 극대화한다. 시승차에는 별도의 후석 모니터까지 장착돼 있었다. 장거리 여행에서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용한 구성이다.
공간 활용의 장점은 트렁크까지 이어진다. 3열을 사용한 상태에서도 적재공간이 제법 깊고 넓다. 시트를 접으면 이야기는 더욱 달라진다. 2열과 3열을 버튼 한 번으로 간편하게 폴딩할 수 있고 거대한 적재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캠핑 장비나 여행용 가방처럼 부피가 큰 짐도 부담 없이 넣을 수 있다. 큰 차를 좋아하고 실제 생활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 미국 소비자들을 위해 오랜 시간 갈고 닦은 노하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친구들과 여행을 떠날 때도 좋고 연인과 레저 활동을 즐기기에도 알맞다. 무엇보다 가족을 위한 차라는 관점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미국식 고급감에 아끼지 않은 편의기능
또 하나의 강력한 장점은 고급스러운 감각이다. 요즘 등장하는 신차들과는 접근 방식부터 다르다. 거대한 디스플레이 하나로 분위기를 압도하거나 기능을 화면 속으로 몰아넣는 대신 좋은 소재를 넓고 풍부하게 사용해 프리미엄을 표현한다.
가죽과 나무를 아낌없이 둘렀고 손이 닿는 곳마다 소재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도어 패널 안쪽에는 퀼팅 자수를 넣었고 경계를 나누는 굵직한 스티치도 과감하게 사용했다. 심지어 대시보드까지 가죽으로 넓게 감쌌다. 천장은 부드러운 스웨이드 소재로 마무리해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유광 블랙 패널과 크롬 파이핑으로 각 영역을 구분한 방식도 조화롭다. 자칫 많은 소재를 사용하면 산만해질 수 있지만 각각의 영역을 명확하게 나누면서 대형 SUV다운 묵직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소재를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사용하는 전통적인 미국식 프리미엄의 매력이 제대로 살아있다.
시트 역시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크고 두툼하며 몸을 포근하게 감싼다. 처음 앉으면 마치 거실의 커다란 소파에 몸을 맡긴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마냥 푹신하고 헐렁하지는 않다. 몸을 잡아줘야 하는 부위에는 적절한 굴곡을 넣어 장거리에서는 편안하고 코너에서는 몸이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는다.
정점에는 매킨토시 사운드 시스템이 있다. 19개의 스피커를 실내 곳곳에 배치해 풍부한 소리를 들려준다. 넓은 실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량과 선명한 표현력이 상당하다. 차분하게 달리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랜드 체로키 L이 지향하는 고급 SUV의 성격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브랜드 상위 라인업답게 각종 기능도 풍부하다.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선명하고 표시하는 정보도 많다. 디지털 룸미러는 거대한 차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후방 시야의 불편함을 효과적으로 줄여준다. 센터페시아 디스플레이는 필요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티맵 내비게이션도 기본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애플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 역시 무선 연결을 지원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수석 앞에는 별도의 디스플레이를 마련했다. 운전자와 독립적으로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고 영상 재생도 가능하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노트북이나 모바일 기기 연결을 위한 HDMI 단자도 센터페시아 아래쪽에 마련했다. 이동 중에도 각 탑승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세심한 배려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마사지 시트는 여러 부위를 제법 힘 있게 눌러줘 장거리 운전에서 피로를 덜어준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기능은 뒷좌석 탑승자를 확인할 수 있는 실내 카메라다. 2열은 물론 3열의 개별 좌석까지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린아이를 태우고 이동하는 가족이라면 운전 중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줄 듯하다.
▲숫자보다 기분 좋은 V6 자연흡기
거대한 보닛 아래에는 3.6ℓ V6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이 들어간다. 여기에 8단 자동변속기와 사륜구동 시스템을 맞물려 최고출력 286마력, 최대토크 35.1㎏·m를 발휘한다. 요즘 대형 SUV의 성능이 상향 평준화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숫자 자체는 다소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터보 엔진은 물론 전기모터의 힘까지 더해 300~400마력을 쉽게 넘나드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운전대를 잡으면 이러한 걱정은 금세 사라진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자연흡기 엔진 특유의 반응이다. 가속페달을 밟는 만큼 힘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회전수를 높이면 V6 엔진이 매끄럽게 힘을 끌어올린다. 터보차저가 만드는 폭발적인 토크와는 다른 종류의 호쾌함이다.
커다란 차체를 언제 어디서나 가뿐하게 움직이고 고속 영역까지 꾸준하게 속도를 붙인다. 급하게 스로틀을 열지 않는다면 일상적인 도로 환경에서 부족함을 느낄 일도 거의 없다. 오히려 차의 크기와 성격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여유로운 출력 특성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파워트레인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승차감이다. 에어서스펜션의 능력이 온로드에서 제대로 빛난다. 요철이나 망가진 노면을 만나도 커다란 차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충격을 한 번 부드럽게 걸러내고 차분하게 자세를 바로잡는다.
덕분에 운전자보다는 오히려 가족들이 더 좋아할 만한 주행감각이 완성된다. 장거리에서도 피로가 적고 2·3열 승객 역시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다.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거칠고 강인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지프에서 가장 신사적인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다.
그렇다고 지프 본연의 능력을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랜드 체로키 L의 또 다른 장기가 시작된다. 쿼드라-트랙 II 4×4 시스템은 2.72대1의 로 레인지 기어비를 갖춰 험로에서 세밀하게 구동력을 전달한다. 다수의 센서가 노면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토크 배분을 조절해 미끄러운 길에서도 빠르게 대응한다.
전후방 카메라는 험로나 가파른 언덕에서 운전자의 시야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상황에 따라 차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에어서스펜션 역시 오프로드에서 제 역할을 한다. 트레일러 견인 상황에서 차체의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는 기능도 갖춰 아웃도어 활용 범위를 넓혔다.
셀렉-터레인 시스템을 활용하면 주행 환경에 맞춰 다섯 가지 모드를 선택할 수 있다. 관련 그래픽과 제공하는 정보도 상당히 자세하다. 온로드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했던 차가 험로에 들어서자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보여준다. 역시 오프로드에 진심인 지프답다.
▲총평
그랜드 체로키 L을 타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이 차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였다. 3열을 갖춘 6인승 SUV를 찾는다면 선택지는 생각보다 뻔하다. 국산 준대형 SUV를 먼저 떠올리고 예산을 높이면 유럽 프리미엄 SUV로 넘어간다. 그 사이에서 그랜드 체로키 L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6명이 제대로 앉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과 곳곳에 숨어 있는 실용적인 편의품목, 좋은 소재를 아낌없이 사용한 고급스러운 실내가 있다. 여기에 V6 자연흡기 엔진의 매끄러운 감각과 에어서스펜션의 편안한 승차감까지 갖췄다. 그러면서도 길이 끝나는 순간에는 지프가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오프로드 실력을 꺼내 든다.
어느 하나의 화려한 숫자나 기능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차는 아니다. 대신 가족과 함께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필요한 능력을 하나씩 따져보면 빈칸을 찾기가 쉽지 않다. 넓고 편안하며 고급스럽고 잘 달린다. 많은 짐을 실을 수 있고 필요하면 험로와 레저 활동까지 거침없이 소화한다. 결국 그랜드 체로키 L의 가장 큰 약점은 차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 차의 진짜 모습을 잘 모른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6인승 SUV를 고민하고 있다면 익숙한 선택지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미국에서 건너온 꽤 괜찮은 대안이 기다리고 있다. 보석은 언제나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빛나는 것은 아니다. 직접 문을 열고 앉아보고 달려봐야 비로소 가치를 알 수 있는 차도 있다. 지프 그랜드 체로키 L이 바로 그런 차다.
김성환 기자 swkim@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