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 대신 페이스노트..약 70㎞ 질주
-드라이버·코드라이버 역할 나누자 평범한 국도가 '랠리 코스'로
-지역 잇는 스캐빈저 랠리..접점 넓히고 사회 공헌 효과도
"다음 삼거리에서 우회전 해야해. 곧바로 표지판이 있나본데, 이 표지판에 뭐라고 써있는지를 맞추는게 퀴즈야."
내비게이션의 음성 안내 대신 옆자리에 코드라이버로 앉은 편집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엉뚱한 길로 접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약간의 의문은 들었다. '이게 무슨 랠리일까.' 싶은 생각 때문이다. 굉음을 내며 비포장도로를 질주하는 랠리카도 없었고 0.1초를 다투는 기록 경쟁도 없었다. 평범한 차를 타고 충남 보령의 국도와 지방도를 달리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10분, 20분쯤 지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평소라면 내비게이션에 맡겼을 길을 스스로 읽기 시작했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대화도 많아졌다.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도착하느냐보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지난 5일 충남 보령에서 열린 'TGR 랠리 플레이'의 풍경이다.
TGR 랠리 플레이는 토요타코리아가 처음 마련한 일반인 참여형 랠리다. '스캐빈저 랠리'에 실제 랠리의 요소를 접목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 스캐빈저 랠리란 보물을 찾듯 여러 지점을 찾아다니며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으로. TGR 랠리 플레이는 여기에 '페이스노트'와 '코드라이버'라는 실제 랠리의 문법을 가져왔다.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는 2인 1조를 이뤄 약 66㎞를 달린다. 빠르게 달린다고 유리한 것도 아니다. 정해진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가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토요타코리아가 속도와 기록을 겨루는 기존 랠리를 일반도로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꾼 이유다.
핵심은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 데 있었다. 요즘 운전에서 내비게이션은 당연한 존재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언제 좌회전해야 하는지, 몇 번째 차로를 타야 하는지까지 알려준다. 길을 잃을 가능성은 크게 줄었지만 그만큼 주변을 읽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랠리 플레이에서는 반대였다. 코드라이버가 페이스노트를 읽고 드라이버에게 진행 방향을 알려준다. 운전자는 앞에 나타나는 교차로와 도로의 모양, 건물과 표지판을 유심히 살펴야 했다. 행사 측도 내비게이션보다 페이스노트를 적극 활용하도록 안내했고 페이스노트에는 단순히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길이 아니라 '운전의 재미'를 위한 별도의 경유지도 넣었다.
그러자 평소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산의 모양을 살피고 마을 입구의 작은 표지판을 찾는다. '여기가 맞나' 싶으면 코드라이버와 페이스노트를 다시 확인한다. 갈림길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길을 잘못 들면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다. 운전자는 도로를 읽고 코드라이버는 단서를 읽어야 한다.
운전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다. 길 안내를 기계에 맡기지 않으니 차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끊임없이 파악해야 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역할도 분명해졌다. 페이스노트 확인과 퀴즈 풀이는 안전을 위해 코드라이버가 맡도록 했다.
코스 구성에서도 토요타의 고민이 읽혔다. 출발점인 아주자동차대학교를 중심으로 가치가게, 정촌유기농원, 신경섭 가옥, 카페천북청보리밭 등을 연결했다.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찍고 돌아오는 코스가 아니었다. 지역 주민들이 만든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부터 농장과 전통가옥, 지역의 자연을 보여주는 장소를 골고루 섞었다.
가치가게에서는 보령 주민 공동체가 만든 로컬 상품을 만날 수 있었고 정촌유기농원에서는 유기농 호밀 빨대를 만들었다. 신경섭 가옥에서는 전통 놀이를 경험하고 카페천북청보리밭에서는 지역의 풍광을 즐겼다. 각 장소에서는 스탬프를 받기 위한 별도의 미션도 이어졌다.
여기서 랠리 플레이의 또 다른 성격이 드러났다. 참가자를 단순히 '보령까지 불러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령 곳곳으로 흩어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참가자는 지역의 카페와 농장, 문화유산, 특산품 판매처를 직접 찾아간다. 차에서 내린 뒤에는 지역 주민과 만나고 상품과 문화를 경험한다. 자동차 행사가 지역을 배경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참가자의 이동 자체가 지역 곳곳과 접점을 만드는 구조다.
특히 목적지 사이의 이동이 하나의 콘텐츠가 됐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인 자동차 행사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랠리 플레이는 반대다. 출발하는 순간부터 다음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전체가 프로그램이다. 부끄럽지만 김좌진 장군의 묘역이 보령에 있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알았을 만큼 보령의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지자체 입장에서도 환영할만한 프로그램이다. 대규모 시설을 새로 만들지 않고 기존의 자연과 문화, 상점과 농장을 자동차 콘텐츠와 연결할 수 있어서다. 모터스포츠 행사가 지역과 상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보여준 셈이다.
이번 행사가 더 흥미로운 이유는 토요타가 최근 국내에서 모터스포츠를 대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토요타는 CJ 슈퍼레이스에서 토요타 가주 레이싱 6000 클래스 네이밍 스폰서십과 프리우스 PHEV 원메이크 레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GR 차주가 직접 서킷을 달리는 TGR 레이싱 클래스부터 어린이를 위한 TGR 키즈 슈퍼레이스 스쿨, 가족 단위 TGR 익스피리언스 데이까지 접점도 계속 넓히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들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분야 중 하나인 랠리다. 서킷 레이스보다 훨씬 낯선 랠리를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한국의 도로 환경과 여가 문화에 맞춰 문턱을 낮췄다. 토요타 차가 없어도 참가할 수 있도록 브랜드 제한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모터스포츠를 '보는 스포츠'에서 '해보는 놀이'로 바꿨다.
토요타 GR이 내세우는 철학은 '도로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차를 만든다'다. 흔히 이런 문구는 레이싱카와 서킷, 우승 트로피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보령에서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일반도로에서 법규를 지키며 달리고 옆 사람과 호흡을 맞추고, 주변 지형을 읽으며 목적지를 찾아가는 경험으로 철학을 풀어냈다.
행사장에서도 모터스포츠와의 연결은 계속됐다. 아주자동차대학교의 AMC 모터페스티벌 갈라쇼와 연계해 드리프트 쇼런과 튜닝카 전시, TGR 브랜드 체험 등을 마련했고 어드밴스드 클래스 참가자에게는 짐카나 프로그램도 제공했다.
스캐빈저 랠리는 끝났지만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한 목적지가 아니었다. 목적지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평소였다면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갔을 도로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갈림길의 모양을 기억했고 주변의 산과 들을 살폈으며 작은 표지판 하나에도 집중했다. 코드라이버를 맡은 편집장과 "여기 맞아?"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도 모르겠다.
자동차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운전자의 개입을 줄여가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내비게이션까지 끄고 직접 길을 찾아가는 경험은 역설적으로 '운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토요타가 보령에서 보여준 건 빠르게 달리는 법보다 달리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모터스포츠를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도 거기에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보령=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