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자동차, 트라반트

입력 2003년10월25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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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 베를린 공과대학 자동차공학과 박사과정]

트라반트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동독 즉,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연구하고 개발해 만든, 동독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한 자동차다. "트라비"라는 애칭으로 더 익숙한 이 차는 얼마 전까지 동독 공산주의 시절의 경제와 이념을 대표하는 유일한 상징물이었다. 동서독 분단 이전부터 자동차생산의 메카로 알려진 쯔비카우의 작센링에서 독일민주공화국 건국과 더불어 제작되기 시작한 트라비는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던 1991년까지 총 300만대 이상이 생산됐다.

쯔비카우가 자동차생산의 메카가 된 건 순전히 아우구스트 호르히라는 뛰어난 자동차 엔지니어 때문이다. 그가 1904년 창설한 호르히 자동차회사와 아우디, DKW 그리고 반더러 등이 합병한 아우토유니온이 작센주의 쯔비카우에 자리잡음으로서 쯔비카우는 이미 1930년대에 독일 자동차생산의 주요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아우토유니온은 군용트럭과 소형 장갑차 등을 생산했고, 독일민주공화국이 건국되자 인민소유 경영체제의 작센링(VEB Sachenring)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공산주의 이념에 맞도록 전 인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승용차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이 때 만들어진 동독의 국민차 트라반트는 독일민주공화국이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영욕의 세월을 같이하게 된다.

분단직후 화폐개혁과 마샬플랜 등에 힘입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에 비해 이념과 정치적 부자유 그리고 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해 초창기 동독의 경제는 매우 부진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동차생산에 절대 필요한 철판을 서방세계로부터 수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개발된 게 바로 트라반트의 듀로플라스틱 보디다.

차체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연료소비를 줄일 수 있었고, 2기통 2행정기관을 사용해 연비와 엔진 효율을 극대화했다. 뿐만 아니라 생산라인 시스템도 일부 자동화해 당시로선 획기적이랄 수 있는 연간 10만대를 만들 수 있었다. 서방세계에서는 아직도 자동차가 일부 부유층의 사치품일 때 트라반트는 이미 동독국민들에겐 마이카시대를 목전에 둔 공산주의 지상낙원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73년 100만대 생산을 고비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트라반트는 계획경제의 경직성과 수익성 악화로 생산시설과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시기를 놓쳐 엄청난 공급부족 현상을 맞게 된다. 공급과 수요로 가격이 형성되는 시장경제원리를 무시하고 책정된 트라반트의 가격은 4,000마르크였으나 수요가 폭증하자 주문하면 평균 12개월에서 최고 14년을 기다려야 하는 구조가 됐다.

공급부족은 80년대들어 더욱 악화돼 4~5년된 중고 트라반트의 값이 새차의 두 배가 넘는 1만마르크 이상 거래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트라반트는 동독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과 비경제성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둔갑했다.

시내트러 독트린, 신사고,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등으로 대변되는 격변의 주변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독 공산당 집권층은 그저 낡은 체제에 눌러앉아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트라반트도 탄생 이후 거의 40여년간 겨우 전기점화장치와 바퀴의 스프링만 개량했을 뿐 50년대 구형모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89년 동독시민들이 헝가리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혁명"을 시작하면서 헝가리 국경 근처에 버려진 트라반트는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동독 공산당을 상징하는 쓸쓸한 모습으로 서방언론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장벽이 무너지고 국경선이 개방되던 날, 수많은 트라비를 탄 동독인들은 “우리는 한 국민”을 외치며 서독으로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서독측은 동독인들에게 1인당 100마르크씩 서독여행 축하금(?)을 주면서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통일이 되자마자 통독정부는 곧바로 트라반트의 생산금지처분과 더불어 향후 한정된 기간 내에 모든 트라반트를 폐기처분할 것을 발표했다. 그 동안 서방세계에서 꾸준히 강화된 자동차의 수동안전도 기준에 비춰 트라반트의 안전도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트라반트가 내뿜는 엄청난 유해 배기가스 때문이었다. 폭스바겐의 대표적인 모델 골프의 200배나 되는 유해 배기가스를 방출하는 트라비는 당시 서독인들의 환경에 대한 안목과 의식으로는 도저히 허락할 수 없는 차였다.

통독 후 채 3년이 안되는 기간동안 그 많던 트라반트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초창기 그렇게 각광받던 차가 공산주의의 종말과 더불어 헌신짝처럼 버림받았던 것이다. 아마 세계 자동차역사상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사라진 자동차는 그 이전에도, 앞으로도 다시는 없으리라.

그러나 트라반트를 생산했던 작센링은 생산중단과 더불어 곧바로 신탁청을 통해 새로운 자본가의 손에 맡겨져 부품업체로 변신, 성공적으로 부활했다. 저스트 인 타임, 모듈 모든 생산라인을 첨단 자동차 생산방식에 맞도록 다시 설비해 폭스바겐, 세아트, 오펠, 사브, 벤츠 등에 각 자동차 부품을 생산, 공급하고 있다. 매출액과 흑자가 해마다 상승해 독일상업은행과 드레스드너뱅크에서 통독 후 구 동독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작센링 부품업체를 꼽을 정도다.

작센링의 판매담당인 마틴 쉡 씨는 인터뷰에서 "오늘날 자동차는 제작업체가 약 25%, 나머지 75%는 부품업체가 모듈방식으로 생산한다. 때문에 부품 모듈업체의 경우 해당되는 프로젝트와 생산량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독시절 2만여명의 종업원이 이제는 2,000여명에 불과하나 생산량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1991년 4월30일 마지막으로 생산된 트라반트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고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한 국가의 역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세계 최초의, 어쩌면 세계 최후의 자동차인 트라반트는 통일 10년이 된 지금은 이제 더 이상 공산주의의 이념이나 통제경제체제를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체제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업자문제와 복지정책에 대한 사회주의의 향수로서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실제 서방의 첨단 자동차메이커는 자동차의 보디를 강화플라스틱으로 대체해 무게를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이는데, 트라반트에 적용됐던 듀로플라스틱 테크닉을 다시 연구개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0여년 전에는 유해 배기가스 방출의 원인으로 지적했던 트라반트의 2행정 엔진이 자본주의의 첨단 기술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오히려 차세대 하이브리드카의 보조동력장치로 각광받고 있다.

공산주의는 사라졌지만 공산주의가 추구했던 사회정책이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각종 복지정책과 실업자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되살아나는 것처럼 트라반트도 비록 박물관으로 사라졌지만 트라반트가 지녔던 기술은 자본주의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환경과 자원절약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아이디어로 재평가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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