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아우토반②/속도 무제한 아우토반이 던지는 메시지

입력 2004년05월05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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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에도 길은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었고 잘 해야 마차 정도가 다닐 수 있었다. 그랬던 길이 자동차가 나오면서 좀더 넓어지고, 길이도 길어지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사람만 다니는 인도와 자전거 전용로가 있는가 하면 자동차만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가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차가 처음 발명됐을 때인 1870년대만 해도 길의 구분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다. 길의 형태와 용도가 다양하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니까 순전히 자동차의 탄생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과연 어느 나라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는 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이탈리아가 서로 최초의 차를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그 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자동차 혹은 그 비슷한 걸 만들어 발표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 명확한 판단은 어려우나 대체로 독일의 고트리프 다임러와 칼 벤츠의 모델을 최초의 승용차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자동차전용로 혹은 고속도로 혹은 아우토반을 가장 처음 만든 나라는 어디일까.

‘Autobahn’이란 독일어로 "자동차도로"라는 아주 단순한 뜻이다. 이 말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때는 1929년이다. 당시 교수이면서 "HaFraBa-프로젝트"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트첸이라는 사람이 "HaFraBa-프로젝트" 3년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아우토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당시 이미 활발한 상용화 단계에 있던 철길이라는 뜻의 ‘Eisenbahn’(아이젠반)에서 유추해냈다고 알려져 있다.

자동차로 인해 파생된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형적인 도로가 바로 아우토반이다. 굳이 아우토반을 정의하자면 "자동차 통행을 위한 교차로가 없는 도로"라고 할 수 있다. 인터체인지 혹은 입체교차로 등 아우토반에도 차가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장치가 있으나, 도로와 도로가 직접 맞부딪치는 교차로가 없으니 당연히 신호등도 없고 운전자가 스스로 정지해야겠다는 의지 외에는 타의에 의해 정지해야 할 필요가 없는 도로다. 물론 교통사고나 정체현상 등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바젤 등 도시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HaFraBa-프로젝트"는 함부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위스의 바젤까지 자동차의 신속한 소통을 위한 도로건설을 위해 협회로 구성됐고,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진행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당시 이 프로젝트는 나찌당이 집권하는 제3국이 들어서면서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종국에는 스위스 로가노를 관통하고 이탈리아의 밀라노를 거쳐 제노아까지 연결되는 국제적인 아우토반으로 탄생됐다.

현재 독일의 남북을 길게 가르는 7번 아우토반이 바로 이 도로다. 참고로 독일의 동서를 가르며 질주하는 아우토반의 번호는 짝수고, 남북으로 늘어선 아우토반의 고유번호는 홀수다. 즉 지도상으로 가로로 놓여진 아우토반 고유번호는 짝수, 세로는 홀수다.

기록상 최초의 자동차전용도로는 1909년 베를린에 건설된 "자동차 교통과 연습의 도로"란 뜻의(Automobil-Verkehrs- und Uebungs-Strasse) 약자인 "AVUS"(아부스)다. 그러니까 최초의 아우토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도로인 셈인데, 아우토반이란 이름은 "HaFraBa-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만들어진 개념이기에 아부스가 생길 당시엔 아우토반이란 이름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하긴 이름이란 항상 실존의 생성 이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아우토반에선들 예외일 수 있으랴….

아부스는 지금도 베를린 중심지에서 베를린 외곽을 도는 원형 아우토반으로 가장 빠르게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도로다. 90년대 후반까지 봄과 가을 1년에 두 번씩 투어링카 레이스가 펼쳐지던 아부스는 1930년대에 이미 최고시속 300km 질주를 기록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우토반의 생성조건은 당연히 자동차이고 필수조건은 자동차의 숫자다. 지금이야 웬만한 나라에서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의 하나요, 다소 비싼 소비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자동차란 왕족이나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1915년 당시 인구 1,000명 당 자동차 수는 독일의 경우 0.5대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기 차를 갖는다는 건 귀족도 보통 정도의 귀족으로는 어림없었다.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유럽과 미국의 자동차보유대수가 현격히 차이나게 된다. 미국은 전쟁에 참여는 했으되 본토가 전장이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마침 포드라는 자동차업계의 신화적인 인물이 대중적인 차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1차 대전이 끝나고 2차 대전이 발발하는 1938년말까지 자동차보유대수는 유럽 각국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38년의 통계를 보면 당시 미국이 인구 1,000명 당 200대였고 독일은 17대였다. 1차 대전 이후 10여년동안 미국은 유럽의 전쟁효과로 한편으론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자동차의 증가로 1920년대 처음으로 교차로없는 6차선의, 소위 "parkway"를 뉴욕과 뉴저지에 건설하게 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고속도로, 즉 최초의 미국식 아우토반인 셈이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집권한 시절에 독일에선 아우토반 건설이 본격화됐다. 히틀러는 집권 후 불과 몇 년새에 총연장 약 4,000km에 이르는 아우토반을 건설함으로써 당시 600만명이 넘던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줬다. 이른바 케인즈가 주장했던 소위 "유효수요" 효과에 의한 국민소득의 증대로 당시 전후 유럽에 치명적이었던 대공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다.

물론 히틀러가 당시 케인즈의 유효수요론을 잘 이해해서 아우토반이나 항만 등을 지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히틀러가 뭘 제대로 알고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전국이라는 위치에서 가장 혹심한 공황의 긴 터널을 유럽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으니 독일인들로서는 당시 히틀러가 독일을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은 게 당연했다.

독일과 우리가 비슷한 게 있다면 한 때 같은 분단 국가였다는 것이다. 또 초기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히틀러와 박정희라는 카리스마 가득한 독재자를 가졌고 히틀러는 아우토반을, 박정희는 고속도로를 건설했다는 것이라면 좀 지나친 비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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