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대 정상보다 더욱 값진 3위

입력 2004년09월30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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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6일, F1 그랑프리가 중국에 상륙했다. 이 역사적인 날, 세계 모터스포츠팬의 눈과 귀는 상하이 서킷(길이 5.432km)으로 몰렸다. 그러나 이 보다 4시간 앞서 이 서킷을 종횡무진 달린 드라이버가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의 유경욱(BMW코리아 이레인)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시상대 정상(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에 서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밟은 상하이 서킷을 필자와 드라이버는 걸었다. 드라이버뿐 아니라 엔지니어도 경기 전에 경기장을 걸어보는 건 매우 중요하다.

서킷에 대한 소감은 대단했다. 5.432km안에 1.2km의 백스트레이트(필자가 본 직선 중 가장 길다. 이 직선 끝에서 반대편 끝을 보면 사람들이 일하는 것 같긴 한데 3명인지 4명인지 알 수가 없다), 800m의 메인스트레이트를 시작으로 코너들도 마치 백화점에 온 기분이다. 헤어핀, 고속, 연속고속 등 모든 코너를 조합해 놓았고, 같은 코너인 듯 싶으면서도 어떤 곳은 역뱅크(기울기가 반대인 코너), 어떤 곳은 마치 미국의 오벌 트랙을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뱅크의 코너 등 모든 코너는 다 모아 놓은 듯싶다. 떠나기 전 조감도를 보며 단순하겠다 싶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유일한 연습세션이 있었던 24일 오전만 해도 팀 분위기는 매우 희망적이었다. 이번에는 분명 애국가를 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습세션에서 유경욱 선수는 4위, 이레인의 중국인 드라이버 한한 선수는 6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1, 2위를 한 선수들은 이 곳 상하이 경기장에서 2번의 주행경험이 있고, 새 타이어를 달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1위와의 차이, 1.209초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주행했고, 계속 빨라진다는 희망을 갖고 나름대로 폴포지션을 조심스럽게 점칠 수 있을 만큼 낙관적이었다.

이런 모든 희망은 24일 오후에 있었던 예선과 함께 사라졌다. F1의 서포트 경기에서 어려운 점은 매시간 노면상태가 바뀐다는 것이다. F1 머신이 주행하기 전과 주행한 이후는 노면의 그립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모든 드라이버에게 똑같은 조건이다. 거의 모든 드라이버들이 연습보다 2초 이상의 랩타임을 줄인 반면 유경욱 선수는 0.5초를 줄이는 데 그치며 2분15초049의 기록으로 11전 스타팅 그리드 11, 세컨드 베스트랩인 2분15초829로 12전에선 12그리드에서 출발하게 됐다.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해 봤다. 차의 셋업은 그다지 바뀐 게 없었다. 결론은 드라이버의 심적 부담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필자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안그래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드라이버에게 계속해서 애국가 얘기를 하며 잠재의식 속에 부담감을 가중시킨 것 같았다. 거의 전 코너에서 브레이킹 포인트가 너무 늦었다.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에 브레이킹을 늦게 하며 코너 중간부터 탈출까지 시간을 계속 까먹은 것이다. 미안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으랴.

25일 F1 예선이 끝나고 치러진 1전의 스타팅 그리드에서 필자는 유경욱 선수에게 이 경기장은 긴 직선구간이 두 곳이나 있으니 추월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란 얘기만 했다. 모두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새 드디어 빨간 불이 꺼지고 17대의 차가 출발했다. 처음은 매끄러웠다. 스타트 직후 1번 코너까지 5대의 차를 추월했다. 선두권에서 사고로 한스린(벨그라비아)이 뒤로 처지고 유경욱 선수는 추월에 박차를 가해 3위까지 올랐다. 그러다 순위를 지키고 싶다는 욕심 때문일까. 뒤차를 막는 데 급급하다 2대에 추월을 주고 5위로 처졌다.

8랩부터 다시 4위의 모레노(미나르디)의 뒤에 바짝 붙어 추월 기회를 노리던 유경욱 선수는 마지막 랩인 10랩의 1번 코너에서 드디어 아웃에서 인으로, 다시 인에서 아웃으로 찔렀다. 이 때 유경욱 선수의 프론트윙이 모레노의 뒤타이어를 건드리며 떨어져 나갓고, 차는 1번 코너 타이어 배리어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날고 안전지대를 그대로 치고 지나가 타이어 배리어에 충돌하는 장면을 스크린을 통해 본 필자는 "끝났구나" 싶었다.

바로 이 때 차가 뒤로 조금 움직이며 서비스 도로를 향해 나오는 게 보였다. 앞부분이 없고, 서스펜션이 휜 상태로 유경욱 선수는 남은 거리를 주행해 10위로 경기를 마쳤다. 당연히 결과를 보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올해 최악의 결과였으니까. 그러나 우린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경욱 선수가 자신감을 찾은 것과 실제로 많은 추월이 가능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드디어 26일 중국 F1 그랑프리가 열리는 날 아침,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만개의 관중석이 꽉 찬 것이다. 안전을 위해 15만석만을 팔겠다던 중국정부는 마음을 바꿔 20만장의 티켓을 모두 팔았고, 그 것도 모자라 경기장 주변은 암표장사와 암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9시30분에 시작된 포뮬러BMW 아시아 12전은 정말 재미있었고, 이레인 식구들에겐 가슴에 남을 경기였다. 어제 1전 때도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뒤에 차가 붙으면 다시 마음이 급해지던 유경욱 선수였기에 필자는 부담을 줄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이번엔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비록 12그리드에서 출발하지만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스타팅 그리드에 가서 필자는 유경욱 선수에게 "난 널 믿는다"고 말했다.

스타트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마치 다른 차들은 서 있고 유경욱 선수 혼자 출발한 듯 했다. 1번 코너까지 6대를 추월하며 6위로 올라섰다. 그 이후로도 계속 안정적인 페이스를 펼치며 추월을 계속해 4위까지 오른 유경욱. 하지만 바로 뒤에 메디 버나니(메리투스)가 붙었다. 메디는 유경욱 선수의 뒤에서 슬립 스트림을 이용해 베스트랩을 뽑으며 계속 압박해 왔다.

12전에서의 유경욱 선수는 어제 11전이나 예선에서의 유경욱 선수가 아니었다. 전혀 흔들림없이 오히려 3위와의 간격을 매랩 0.5초씩 줄이며 쾌주했다. 결국 4위로 체커기를 받았다. "1랩만 더 있었어도"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스타트 직후 눈에 보이는 점프 스타트를 한 타이슨(미나르디)이 페널티를 받을 걸 알고 있었기에 시상식에 올라간다는 기쁨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지금까지 유경욱 선수는 12전 중 7번째 시상대에 올랐다. 하지만 오늘의 시상대는 다른 때와 전혀 달랐다. 12그리드에서 출발해 시상대에 오른 것이다. 그 것도 완벽한 자신감 회복과 함께. F1 그랑프리의 시상대 뒤에 서서 시상대에 올라가는 유경욱 선수를 보며 필자는 이레인의 이승헌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정말 배경으로 애국가를 깔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1위보다 값진 3위를 차지한 경욱이가 시상대에 오르고 함께 태극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난다고. 사장님도 같이 우는 게 느껴졌다.

한편 F1 경기를 보러 온 독일 모터스포츠 관계자들은 유경욱 선수의 파이팅을 보며 내년 계획을 묻고 조심스럽게 내년 독일 F3의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유경욱 선수 정도면 시상대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란 말과 함께.

포뮬러BMW는 10월17일 우리의 홈그라운드 대한민국 태백에서 최종전을 갖는다. 정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경기장에 찾아와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국제 경기 전 시리즈에 참가하고 있는 유경욱 선수를 응원해주시길 바란다. 이젠 정말 경욱이를 믿는다.

전홍식(이레인 레이싱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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