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가 한국에서 어코드에 이어 두 번째 칼을 빼들었다. CR-V다. 보도자료에는 "도시형 SUV"라는 수식어가 CR-V라는 이름 앞에 붙어 있다. CR-V는 컴퍼터블 런어바웃 비클(comfortable runabout vehicle)의 머릿글이다. ‘편안하게 어디든지 달릴 수 있는 차’라는 의미다. 이 차의 지향점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이름이다.
CR-V는 세계시장에서 180만대 이상 팔린 차다. 뒤늦게 한국시장에 투입된 것. 95년에 일본 내수모델로 선보인 뒤 2세대 모델부터 국제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CR-V는 토요타 RAV-4, 미쓰비시 파제로 미니 등과 더불어 소형 SUV라는 장르에 속한다. 일본에서 시작된 소형 SUV 바람은 포드 이스케이프, 랜드로버 프리랜더 등 미국, 유럽업체에도 영향을 미쳤고 급기야 한국에도 현대 투싼, 기아 스포티지 등이 등장하게 됐다. 결국 이들 모델이 시장에서 경쟁한다고 보면 된다.
소형 SUV의 등장은 SUV의 차종다양화 과정에서 필연적이었다. SUV시장은 덩치 크고 값비싼 차종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차를 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 탓에 실제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적었다. 소형 SUV는 바로 이런 틈새를 파고든 장르다. SUV이면서도 크지 않은 차체에 중형 세단급 가격에 살 수 있게 만들면서 히트를 친 것이다. SUV를 갖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주고 메이커들은 짭짤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2003년 북미시장에서의 판매대수를 보면 CR-V가 단연 ‘최고’다. 그 만큼 만만치 않은 강자가 막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디자인
CR-V는 깔끔한 모습이다. 헤드램프와 라디에이터 그릴에는 현대적 감각이 묻어 있다. 리어 컴비네이션 램프는 D필러를 따라 길게 배치됐다. 스페어 타이어를 뒷문에 매단 건 흔히 쓰는 방식이다. SUV를 개발할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중 하나가 스페어타이어 위치다. 트렁크 바닥에 숨겨 놓든가, 차 안 트렁크공간 옆에 세워 놓은가 하면 이 처럼 뒷문에 매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도시형 SUV와 문에 매단 스페어 타이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잡소리가 발생할 위험도 큰 구조다.
차창이 큼지큼직하게 만들어져 안에서나 밖에서나 시원하다. 밖에서 들여다보기도, 안에서 내다보기도 그렇다.
실내에 들어서면 혼다의 장난기가 느껴진다. 변속레버는 계기판 옆 대시보드에 붙어 있고 사이드 브레이크는 마치 헬기의 조종간같은 모양으로 센터페시아에 자리잡았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는 컵홀더와 간단한 수납대가 있는데 레버를 젖히면 이 수납대는 접혀지면서 뒷좌석과의 통로가 된다. 실내에서 뒷좌석으로 바로 건너갈 수 있는 워크스루가 가능해진다. 이런 부분에서 혼다의 튀는 창의성을 볼 수 있다. 일선 개발자들, 엔지니어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는 혼다의 기업문화를 읽을 수 있는 요소들이다. 고위 경영자가 ‘하던 대로 무난하게 할 것’을 원하고 강요하는 분위기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레이아웃이다.
뒷좌석 바닥은 평평하다. 4WD나 뒷바퀴굴림차들은 뒷차축으로 가는 드라이브 샤프트 때문에 차 실내에 센터터널이 높게 형성되지만 이 차는 그 게 없다. 섀시를 낮게 배치해 드라이브 샤프트가 실내를 간섭하지 않게 했다. 덕택에 실내 공간은 더 효율적이다.
▲성능
CR-V를 운전하면서 받은 첫 느낌은 스티어링 휠이 무겁다는 것이다.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핸들이 예상보다 무거워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무겁다는 게 큰 힘을 더 써야 할 정도를 말하는 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차이에도 우리 몸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적응하면 큰 문제될 게 없을 정도의 차이다.
시트는 그리 넓지 않다. 꽉 낀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곧 시트가 몸을 제대로 지지한다는 말이다. 엉덩이, 옆구리 등이 시트와 잘 밀착됐다. 시트와 몸의 일체감은 운전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 만큼 적극적으로 차를 운전할 수 있게 해준다.
서스펜션은 조금 물렁거리는 편이다. 핸들을 좌우로 살짝살짝 틀어보면 차가 휘청거린다고 느낄 정도다. CR-V의 C는 컴퍼터블, 즉 편안한 승차감을 뜻한다. 서스펜션이 소프트한 이유가 된다. 하체는 꽉 조여졌다기보다 조금 헐거운 느낌이다.
가속 페달을 꾹 밟으면 엔진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가속은 급하지 않게 무리없이 이뤄진다. 그러나 시끄럽다. 처음엔 엔진소리가, 속도가 높아지면 바람소리가 귀를 괴롭힌다. 그래서 그런가. 시속 120km만 돼도 체감속도는 훨씬 높아 심리적 불안감이 컸다. 가속력은 무난한 수준이다. 스포츠카처럼 튀어나가는 맛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굼뜬 발걸음도 아니다.
이 차의 엔진은 i-VTEC DOHC다. 밸브 타이밍과 밸프 리프트를 엔진회전 상태에 맞춰 바꿔주는 VTEC 엔진에 흡입밸브의 위상을 엔진부하에 따라 조절해주는 기능을 더했다. 엔진에 적용된 앞선 기술은 운전자가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확’ 달라진 맛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제원표를 보면 출력과 연비, 배기가스 등에 두루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단 자동변속기는 주행상황과 엔진파워를 적절히 조화시키며 차를 움직이게 해준다. 변속레버엔 D3 버튼이 있다. 일종의 파워 모드로 가는 버튼이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엔진이 즉각 반응한다. 시차가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원하는 만큼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계기판에는 연비가 계속 표시돼 운전을 하다가 매번 체크하게 된다. 경제운전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장치다. 가속 페달을 꾹 밟으면 연비가 0km/ℓ에 가깝게 표시되는데 어느 누가 가속 페달을 오랫동안 밟을 수 있을까.
잠깐동안 오프로드 주행을 거쳤다. 젖은 길도 있고, 미끄럽기도 한 오프로드다. ABS에 EBD(제동력 분배시스템), VSA(비클 스태빌러티 어시스트) 시스템이 거의 완벽하게 차의 자세를 제어해준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ABS 작동이 브레이크 페달을 통해 전해지고 미끄러운 길에서 급가속하며 방향을 틀면 VSA가 차를 안정되게 유지해주는 걸 알 수 있다.
CR-V의 4륜구동장치는 이른바 리얼타임 시스템이다. 정상적인 주행 상태에서는 앞바퀴에 대부분의 구동력을 전달해 연비를 향상시킨다. 그러나 주행조건에 따라 4륜구동이 필요한 경우, 이를 테면 미끄러운 길에 접어들거나 오프로드를 만나면 네 바퀴에 고르게 동력을 전한다. 로 레인지는 없다.
▲경제성
앞서 말했듯이 소형 SUV는 경제적 메리트가 크다. 단적으로 말해 ‘싼 값에 탈 수 있는 SUV’라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990만원을 주면 CR-V를 탈 수 있다. 두바퀴굴림이다. 3,390만원을 내면 네바퀴굴림차를 살 수 있다. 수입 SUV가 이 정도 가격이면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우영 혼다코리아 사장은 신차발표회 자리에서 “특별히 싸게 정한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가솔린엔진과 함께 디젤엔진 모델도 함께 들여 왔으면 좋았겠으나 아쉽게도 디젤엔진차는 수입되지 않는다.
CR-V는 만만히 볼 차는 아니다. 세계시장에서 이미 저력을 충분히 보여준 차다. 하지만 기자는 도대체 어떤 점이 이 차를 그렇게 많이 팔리게 했는 지 솔직히 알 수가 없다. 품질이나 성능이 확연히 돋보이거나 차별되지 않는데도 CR-V가 소형 SUV 강자로 군림하는 이유는 좀 더 두고 살필 과제로 남긴다.
투싼이나 스포티지같은 국산 소형 SUV와 비교할 때 CR-V가 비싼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수입차라는 것, 혼다라는 브랜드 이미지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이를 수긍하고 않고는 소비자들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
시승 / 오종훈 기자 ojh@autotimes.co.kr
사진 / 강경숙 기자 cindy@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