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슬러 그랜드보이저를 만났다. 미니밴에 관한 한 크라이슬러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메이커다. 80년대에 좌우측 슬라이딩 도어를 적용한 카라반으로 미니밴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메이커가 바로 크라이슬러다.
그랜드보이저가 꺼내든 비장의 무기는 두 개다. 디젤엔진과 스토앤고 시스템. 내수시장에 부는 디젤 바람을 타고 수입차에도 디젤차들이 속속 가세할 전망이고 보면 수입 디젤차시장의 선두그룹에 끼는 차로 꼽을 만하다. 시장진입 순서가 선두그룹이란 뜻이다.
▲디자인
영락없는 미니밴이다. 딱 보면 한 눈에 차를 알 수 있다. 스스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스타일이다. 퓨전이니 크로스오버니 하는 현란한 수식어는 이 차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미니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솔직담백함을 느낀다.
크라이슬러의 윙 엠블럼은 이 차에도 잘 어울렸다. 윙 엠블럼은 라디에이터 그릴에 자리잡아 이 차의 핏줄을 말해주고 있다.
계기판은 깔끔하게 정돈된 네 개의 원으로 구성됐다. 계기판 위로 얇게 배치된 별도 공간에 엔진 상태 등의 별도 정보를 표시하게 만들었다. 평소엔 눈길을 주지 않고 이상이 있을 때야 체크하게 되는 사항들을 중앙 계기판에서 떼어내 그 위로 둔 것. 재떨이는 자취를 감췄다.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상황을 아예 배제했다. 담배는 이제 자동차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크라이슬러의 기발한 상상력은 ‘스토앤고’라는 시스템에서 빛을 발한다. 운전석 뒤로 배치된 5개의 좌석을 눈깜짝할 사이에 완벽하게 차 바닥으로 접어 넣을 수 있는 장치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장치지만 번거롭고, 복잡하고 등등의 여러 이유로 실현하지 못했던 걸 크라이슬러는 보란 듯이 깔끔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마치 마법의 손처럼 시트를 접어 넣었다, 펴냈다 할 수 있다. 기계 다루는 것과 친하지 않은 여성들도 두세 번의 손동작만으로 시트를 숨기는 마술을 보일 수 있을 정도다. 상상을 구현하는 마술같은 기술이다.
차 바닥 아래로 시트가 접혀들어갈 공간을 마련하느라 시트 포지션이 조금 높아진 듯도 하지만 탓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시트가 높아진 데다 차창을 넓게 배치해 사방이 탁트인 개방감을 준다.
뒷문과 옆문은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열고 닫힌다. 억지로 힘을 쓸 필요가 없어 어린이나 노약자도 쉽게 문을 여닫을 수 있다.
실내 지붕에는 1, 2, 3열 시트에 맞춰 안경등을 수납할 수 있는 이동식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핸드폰을 넣어둘 수 있게 별도의 장치를 배려한 센터콘솔은 통째로 탈착이 가능하다. 거추장스러우면 떼어낼 수도 있다. 카라반이 그랬듯이 기능적인 미니밴의 모범답안을 시대에 맞춰 다시 제시하는 차다.
▲성능
디자인에서 ‘스토앤고’가 최대 특징이라면 성능면에서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역시 디젤엔진이다. 이 차는 그랜드체로키 디젤이 생산되는 오스트리아 그라츠공장에서 만들어진다. 미국 미니밴이지만 생산지는 유럽이다. 올라가는 엔진은 4기통 2.8ℓ 16밸브 커먼레일 디젤. 최고출력 150마력, 최대토크 34.5kg·m의 성능을 낸다.
이 차의 엔진소리는 어디에서 듣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운전석에서 내려 엔진룸 옆에 서서 들으면 영락없는 디젤엔진이다. 으르렁거리듯 토해내는 엔진 소리가 무척 크다. 그러나 운전석에 올라앉아 문을 닫고 시동을 걸면 "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디젤엔진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밖에서 들은 소리와 전혀 다르다. 순한 양이 엔진룸에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디젤엔진인만큼 rpm 허용범위가 넓지 않다. 4,200 전후에서부터 레드존이다. 이 차의 가속감은 매우 특이하다. 디젤엔진답게 가속감이 시원하거나 탁 터지는 건 아니다. 스포츠카의 그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특유의 가속감은 살아 있다. 부드럽지만 꾸준함,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뒤에서 부드럽게 밀어주는 기분이다. 결코 굼뜨다거나 느리다는 느낌을 주진 않는다.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부드러운 가속감’을 체험할 수 있다. 중저속에서부터 굵은 토크가 차체를 밀어준다. 미니밴인 만큼 고속보다는 실주행 영역인 중저속에서의 특성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서스펜션은 부드러운 편. 뜻밖에 뒷바퀴에 달린 스프링은 코일 스프일이 아닌 리프 스프링, 즉 판스프링이다. 화물차나 상용차에 주로 사용되고 승용계통에서는 요즘들어 보기 힘든 방식이다. 승차감에는 큰 도움이 안되는 리프 스프링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서스펜션 특성을 느끼면서 "왜 굳이 리프 스프링일까"하는 의문은 남았다.
▲경제성
이 차의 무게는 2t이 넘는다. 만만치 않은 무게를 디젤의 효율성으로 커버해 9.5km/ℓ의 연비 수준을 보인다. 디젤 자체의 가격이 계속 오르는 추세여서 연료값이 싸다는 메리트는 갈수록 줄어든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디젤 가격이 휘발유보다는 싸고, 디젤의 연비가 휘발유보다 매우 우수하다는 것. 기본적으로 디젤이 갖는 경쟁력이 크다. 적어도 경제성만을 놓고 볼 땐 그렇다.
그랜드보이저의 판매가격은 4,950만원. 크라이슬러가 유럽에서 만들었다는 이 차의 가격이 적정한 지 아닌 지는 사실 까탈스럽게 따질 일이 아니다. 수입차시장에서 유일한 미니밴이기 때문이다. 포드 윈드스타가 라인업에서 빠진 이후 국내시장에서 팔리는 수입 미니밴은 이제 이 차밖에 없다. 물론 앞으로 한두 종의 수입 모델이 추가될 전망이긴 하지만 그랜드보이저는 당분간 유일한 수입 미니밴 자리를 만끽해도 좋을 듯 하다. 역시 미니밴은 크라이슬러다.
시승·오종훈 기자 ojh@autotimes.co.kr
사진·강경숙 기자 cindy@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