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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스타 피닌파리나. |
피닌파리나의 원래 성은 파리나였다. 그의 성이 피닌파리나로 바뀐 건 1961년으로 이탈리아 사회와 산업에 대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파리나의 애칭인 ‘피닌’을 결합한 피닌파리나로의 개명을 대통령령으로 인가받으면서부터다. 피닌(Pinin)은 "작다"는 뜻으로 설립자인 바티스타의 키가 작아 불리던 애칭이다.
피닌파리나는 1893년 11월 11명의 아이들 중 10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지오바니는 카우치 빌더의 견습생으로 입사해 일을 배운 뒤 1917년 다른 형제 두 명과 함께 자동차 정비와 마차를 설계하는 회사 스태빌리멘티파리나를 세웠다. 11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피닌 역시 자연스레 이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게 됐고, 디자인에 대한 가능성을 보였다.
그는 1920년 미국의 발전상을 보기 위해 여행하다가 디트로이트에서 헨리 포드를 만났다. 포드는 피닌파리나가 미국에 머물면서 포드에서 근무할 걸 원했으나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짧은 미국방문으로 새로운 기술정보와 자동차업체들의 활동상을 눈여겨 보게 된 피닌파리나는 이 때부터 새로운 도전을 하리라 결심하게 된다.
1930년 마침내 그는 형의 공장을 떠나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를 설립했다. 당초 계획은 수작업차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후 수작업 단계를 넘어서는 좀 더 포괄적인 작업을 목표로 1일 7~8대의 차를 생산할 수 있는 라인을 구축했다. 또 란치아, 피아트, 알파로메오, 아소타 프라스치니 등 이탈리아 자동차업체는 물론 1931년엔 캐딜락, 1932년 벤츠 등도 그의 공장을 거쳐 갔다.
피닌파리나의 독특한 에어로 다이내믹 디자인은 어떤 브랜드에서든 환영받았다. 1939년 회사는 종업원 500명에 연간 800대의 차를 생산할 정도로 규모가 늘어났으며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카디자인업체가 됐다. 그러나 세계대전 기간동안엔 군대 장비와 앰뷸런스, 트럭, 군용기 및 선박의 부품 보조 공급 등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전쟁 후 피닌파리나는 다시 디자인과 생산을 시작했고 1946년 ‘이 시대 최고의 모델 8대 중 1대’, ‘움직이는 예술’이란 찬사를 받으며 뉴욕 현대미술관에 영구 전시된 치시탈리아를 선보였다. 이 차는 카디자인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가장 조화롭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으며, 전후시대 자동차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또 세계의 대형 자동차업체들은 그와의 협력을 다시 시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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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로메오 줄리에타 스파이더. |
1952년 피닌파리나는 ‘엠버서더’로 미국시장에 진입했으며 토리노공장에서 내시 힐리의 디자인 및 소량생산을 시작했다. 그는 존경받는 디자이너로 미국 자동차역사 초기에 힘을 보탠 셈이다. 이듬해에는 더 많은 업체들이 그에게 디자인을 의뢰했고, 피닌파리나는 대형 카디자인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1954년 데뷔한 알파로메오 줄리에타 스파이더는 2만7,000대를 생산, 피닌파리나는 상업적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됐으며, 이 때부터 대기업에서 만드는 특수 제작차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피닌파리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는 바로 페라리다. 1950년대 경주차를 일반도로용으로 개조해 품질에 문제가 많았던 페라리는 1952년 창업자 엔초 페라리가 피닌파리나와 손을 잡았다. 치시탈리아와 비슷한 스타일의 212를 처음으로 테스타로사, 356GT/4, F40, F50, 미토스 등의 명차가 모두 피닌파리나 작품이다. 피닌파리나는 또 피아트 130 쿠페, 란치아 베타 몬테카를로, GM 크로노스 등으로 독창적이고 뛰어난 스타일을 보여줬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회사 일에 부분적으로 관여했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문화 및 자선활동 등으로 보냈다. 기술과 미학의 결합을 중시하며 이탈리아의 정열적인 스포츠카 페라리를 뛰어난 성능과 함께 ‘예술품’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던 매혹적인 디자이너 피닌파리나는 1966년 4월3일 생을 마감했다.
진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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