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현대산업개발 전 회장이 별세했다. 이승에서의 마감은 건설에서 했으나 정 전 회장이 자동차산업인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포니와 스텔라 등 국산 고유모델을 개발하며 미국 수출길을 연 장본인이자 현대자동차의 탄탄한 기초를 닦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 회장을 처음 본 건 지난 97년 도쿄모터쇼에서다. 그렇다고 딱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고작이다. 당시 정 회장은 대기업 경영자에 걸맞는 화려함보다는 수수한 인상에, 다소 낡은 구두를 신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쏟아지는 질문에도 조목조목 논리를 펴가며 대답했던 기억은 뇌리에 오래 남는다.
이후 정 회장은 큰 아들 정몽규를 전면에 내세우며 후계구도 작업을 해 왔다. 현대의 신차발표가 있을 때마다 정몽규 회장이 전면에 부각됐고, 정몽규 회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현대를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키우겠다는 욕심을 밝혔다. 그러나 그 욕심은 "왕자의 난"으로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됐고, 이들 부자는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정 회장의 측근이었던 일부 임원들은 현대자동차를 떠나는 데 대해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작고한 정주영 왕회장의 지시이긴 했지만 30년 가까이 현대자동차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이들에게 아쉬움이 없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측근들에게 현대자동차와 관련된 언급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런 이유 때문인 지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긴 후 몇 차례의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성사되지 못했다.
고위 임원들의 얘기는 "현대자동차에 관해 아무 할 말이 없다"였다. 물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을 게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가 할 말이 있어도 섣불리 내뱉어봐야 오너일가 간 분란만 일으키는 꼴이어서 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 인수에 성공하며 지금의 정몽구 회장 체제로 급속히 재편됐다. 기아 인수 후 현대·기아 내부에선 성골과 진골, 육두품 등에 비유될 정도로 어느 회사 출신이냐가 중요하게 부각됐다. 정몽구 회장과 한솥밥을 먹었던 현대정공 출신이 성골로 분류돼 회사의 주요 보직을 차지한 반면 육두품에 비유된 기아 출신 임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갔다. 중간급인 진골에 해당되는 현대자동차의 기존 임원들은 새 회장을 맞아 승승장구하거나 또는 낙오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얼마 전 정세영 회장과 정몽구 회장 시대를 모두 겪었다는 현대자동차 출신 임원을 만났다. 공석이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두 회장의 장점과 단점 비교가 화제가 돼 흥미있게 들은 적이 있다. 그 임원은 정세영 회장을 심사숙고형으로, 정몽구 회장을 돌격대장형으로 비유했다. 정세영 회장은 "돌 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반면 정몽구 회장은 "직관에 의존한 감각경영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 게 더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세영 회장이나, 조카인 정몽구 회장이나 현대자동차를 놀랍게 성장시켰다는 점에선 우열을 가릴 수 없어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은 국내 자동차업계를 지휘하는 스타일이다. 업계에선 지금의 정몽구 회장 시대보다 정세영 회장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정세영 회장의 경우 경쟁업체와 경쟁은 하되 공존해야 상생할 수 있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반면 정몽구 회장은 글로벌 경쟁시대에 국내업체라 해도 경쟁의 싹이 트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 지 실제 국내 자동차업계는 현대·기아를 지지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나눠져 있다. 심지어 완성차 5사를 대표한다는 한국자동차공업협회조차 이 같은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현대·기아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80%에 가까운 데다 현대·기아의 지원없이는 자동차업계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 쏘나타의 매연 문제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동호회에선 리콜을 요구하지만 제조사는 리콜할 만큼 품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중재는 정부 몫이지만 엄청나게 커버린 현대·기아를 정부가 얼마만큼 컨트롤할 지는 미지수다. 현대·기아가 세계 속에서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에야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경쟁자가 없는 곳에서 힘없는 소비자를 울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금처럼 간다면 국내 소비자들은 어쩌면 경쟁자없는 시장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를 일이다.
권용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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