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반을 주름잡은 불운의 디자이너

입력 2005년07월21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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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친토 기아는 불운의 카디자이너였다. 젊은 나이에 카로체리아를 세워 자신의 꿈을 펼쳤으나 뜻하지 않은 병을 얻어 제대로 일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로체리아 기아는 직계 후손이나 친척들이 물려받은 다른 회사들과 달리 여러 번 주인이 바뀌며 현재는 새로운 주인과 함께 디자인 전문회사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듀얼 기아.


1887년 9월, 세째 아들로 태어난 지아친토는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3세 때부터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카우치빌더 공장에서 일했다. 10대 소년이 모두 그렇듯 지아친토 역시 초기 자동차들을 보며 매력을 느꼈고, 어린 나이에 산업전선으로 내몰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보다 새로운 일에 빠져들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카우치빌더였던 래피드를 거쳐 디아토로 자리를 옮겨 테스트 드라이버까지 겸하며 숙련된 자동차전문가로 성장했다.



이런 그의 희망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던 것.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치료를 받으며 이제 자신의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동생 세라노, 가라글리오와 함께 1915년 이탈리아 토리노에 카로체리아 기아&액티스란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는 베르토네에 이어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카로체리아로 현재까지 군림하고 있다.



지아친토는 초기엔 부호들을 위해 디아토, 이탈라, 스카토 등의 보디 제작을 멋지게 해내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1926년 의붓동생인 조르지오 알베르티의 입사 이후 액티스란 이름을 떼고 "카로체리아 기아"로 새 출발했다.



그가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건 1933년 피아트 508 발릴라 스포츠 쿠페를 만들면서부터. 이 차는 1930년대를 휩쓴 소형차로 4기통 995cc에 최고출력은 20~30마력 정도, 최고시속은 110km로 1,000마일 및 골드컵같은 여러 버전이 나왔다. 이후 그는 피아트, 알파로메오, 란치아 등과 손잡고 뛰어난 기술로 소량생산을 고집하며 장인의 길을 걸었다.

카르만 기아.


잘 나가던 지아친토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 기아는 이제 군대를 위해 자전거를 생산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아친토는 1944년 병을 얻어 5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절친한 친구였던 조르지오 알베르트와 펠리체 마리오 보아노에게 회사를 넘겼다. 보아노는 기차역 인근으로 회사를 옮긴 이후 크라이슬러와 접촉하는 등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당시 젊고 유명한 디자이너 루이지 세그레에게 다시 회사를 팔았다.



1950년대 카로체리아 기아의 운영을 맡은 루이지 세그레는 활기를 잃은 회사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사업을 확대해 드라이에, 벤틀리, 탈보 등 여러 자동차회사와 손잡고 차체 생산에 주력하면서 처음으로 미국에 손을 뻗쳐 크라이슬러와도 제휴했다. 3년후 기아는 4도어 컨버터블 파이어 봄과 카르만 기아를 통해 세계적으로 다시 유명해졌고, 그 인기에 힘입어 이 차들은 양산되기까지 했다.



파이어봄의 양산명은 듀얼 기아. 이 차는 호화 스포츠카로 미국에서는 ‘듀얼 기아를 살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롤스로이스가 있다’는 광고가 나올 정도였다. 1년에 150대 정도 생산했으며 프랭크 시나트라, 피터 로포드같은 헐리우드 스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V8 엔진에 최고출력은 230~285마력 정도였으며 최고 시속은 192km였다. 1958년까지 2년동안 양산했다. 카르만 기아는 폭스바겐의 엔진과 섀시를 기초로 기아가 디자인했으며 독일의 카르만이 제작을 맡은 2+2 쿠페다. 이 차는 기아자동차 스포티지를 위탁 생산하면서 국내에 잘 알려졌다.

카르만 기아 타입14.


50년대 중반 기아는 차의 스타일링과 설계부문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엔진출력을 계속 높이고,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링 등에 신경쓰기 시작한 것. 고성능 엔진과 낮은 차체, 공기저항을 줄인 매끈한 앞모습으로 최고시속이 빨라졌고, 1955년 컨셉트카 길다는 큰 성공을 거뒀다. 60년대엔 미국 빅3를 비롯한 많은 자동차회사의 프로토 타입과 양산차 설계를 맡았으며 크라이슬러 임페리얼, 르노 플로이드, 볼보 P1800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1963년 세그레마저 사망하자 회사는 크게 기울었고 1967년 미국 로원컨트롤러에 매각된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레이서를 했던 알렉산드로 데토마소는 기아 사장으로 부임해 생산라인을 합리화하고 페인트공장을 세운 이후 크라이슬러 450SS, 데토마소 망구스타의 쿠페와 스파이더, 마세라티 기블리 등 이름난 차들을 만든다. 당시 기아의 수석 디자이너가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피아트를 거쳐 베르토네에서 일하던 주지아로는 1965년 수석 디자이너 겸 개발책임자로 기아에 합류해 마세라티 기블리, 데토마소 망구스타 등을 디자인해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데토마소와 뜻이 맞지 않아 1년4개월만에 퇴사하고 1968년 이탈디자인을 세웠다.



1970년 로원컨트롤러는 기아의 주식을 팔아 포드가 80%, 데토마소가 20%의 주식을 각각 차지했다. 이 때부터 기아는 포드의 이탈리아 스튜디오가 돼 큰 역할을 담당한다. 기아는 포드의 대표적 소형차 에스코트와 카프리, 중형차 스코르피오 등의 개발에 참여해 히트모델로 만들었다. 1986년엔 미국차의 자존심을 세워준 토러스(세이블)를, 1994년엔 카를 개발했다.



카는 보닛이 헤드램프를 가로지르는 과감한 선 처리와 부드러운 느낌의 둥그런 뒷모습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뉴 엣지 디자인의 선구자다. 초기에는 판매가 신통치 않았으나 현재는 유럽 소형차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1996년 토리노모터쇼에 소개한 4인승 4도어 컨셉트카 튜링 카는 장거리 여행과 스포츠 왜건의 용도를 모두 만족시키는 모델이다.

기아 로고.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우치빌더공장에서 출발한 가난한 소년은 이제 세계를 주름잡는 카디자인회사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진희정 기자 jinhj@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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