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파리의 연인’으로 글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니. 많은 여인들이 죽고 못사는 배우 박신양이 극중에서 폼나게 타고 다녔던 차가 오늘 시승할 차다.
아, 첫 모습을 그 때 드러낸 건 아니다. 이미 호주의 GM홀덴이 팔고 있던 차다. 스테이츠맨. ‘정치가’라는 뜻이다. ‘정치가’라는 단어를 차 이름으로 쓰다니. 정치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한국보다는 호주에서 훨씬 더 좋은 탓일까.
국산차메이커 GM대우는 이 차를 팔면서 수입업체로서의 지위도 갖게 된다. 완성차메이커이면서 동시에 차를 수입해다 파는 입장이기도 한 것.
어쨌든 문제의 차 스테이츠맨을 뒤늦게 서둘러 시승했다. 서두르지 않았다면 시승조차 못할 뻔했다.
▲디자인
넘겨 받은 스테이츠맨은 그 동안 봐 왔던 것만큼 멋있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나 사진에서만큼 폼도 나지 않았다. 과장되거나 포장됨없이 있는 그대로의 스테이츠맨이 맨 몸으로 서 있었다. 새 차라기보다 오래 묵은 친구같은 느낌으로….
이런 느낌은 균형잡인 디자인에 기인한다. 어느 앵글에서도 튀지 않게 기본을 강조한 무난한 디자인이다. 덕분에 첫 눈에 확 당기는 매력은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은근한 맛이다. 기본에 충실한 단순함. 정치인들의 옷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스테이츠맨의 디자인이다.
차 길이는 5.2m에 달한다. 다른 대형차에 전혀 뒤지지 않는 덩치다. 크기에서 오는 공간의 넉넉함은 뒷좌석에 배려했다. 뒤에 앉아 가죽시트에 비스듬히 몸을 묻고 다리를 꼬고 앉아도 앞뒤 공간이 조금 남는다. 앞좌석 헤드레스트 뒷면에는 TV 모니터가 있다. 센터페시아에는 모니터가 생략됐다. 당연히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내비게이션도 없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뒷좌석 중심이다.
뒷좌석에 3명이 앉으면 가운데 사람은 자세가 어중간해진다. 드라이브 샤프트가 지나는 센터터널이 우뚝 솟아 뒷좌석 바닥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우측핸들이던 차가 좌측핸들로 변경됐으나 사이드 브레이크는 원래 있던 자리 그대로다. 운전석에서 보면 변속레버를 지나 사이드 브레이크다. 조금 멀지만 불편하진 않다. 그러나 차급으로보면 ‘불편하지 않는 정도’여선 안된다. 최고급 대형차를 지향한다면 하나라도 더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사이드 브레이크 하나 위치 변경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문제는 소비자들이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다.
운전석에 앉으면 한 5~6년 전쯤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난다. 인테리어 때문이다. 센터페시아에서 변속레버를 지나 센터콘솔까지의 배치를 보면 자를 대고 줄을 그어 놓은 것 같다. 미적 감각보다는 효율성을 먼저 생각해서일까. 세련됨, 고급스러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엔진룸에는 스트럿바가 있다. 원래는 스포츠카의 보디 강성을 높이기 위한 부품이지만 이 차에서는 차의 자세를 안정되게 해 승차감을 더 높이기 위해 만들었다고 봐야 할 듯 하다. V6 엔진은 중앙에 세로로 배치됐다.
뒤를 살피며 머플러에 눈이 멎는 순간, "이 차의 배기량이 얼마지?"라는 의문이 든다. 3.5ℓ가 넘는 배기량인데 머플러는 달랑 하나다.
트렁크룸은 충분히 넓다. 골프백 몇 개 넣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고개를 트렁크룸 안으로 집어 넣어 시선을 위로 돌리면 뜻밖의 허점이 보인다. 트렁크룸 안쪽 스피커 주변에 철판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소형차에서는 이런 경우가 태반이지만 적어도 한 메이커의 최고급차라면 좀 더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능
스테이츠맨은 조용하다. rpm 2,000~3,000의 평상 주행속도에서는 그렇다.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아 속도를 끌어올리면 속도보다 소리가 먼저 커진다. 말많고 시끄러운 정치같다. rpm이 오르면서 소리가 한 템포 먼저 커지고 난 뒤 시프트다운이 되면서 차체가 뒤늦게 반응한다.
달리는 동안 차의 움직임은 안정적이다. 뒷바퀴굴림차의 승차감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속도를 높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는다. V6 3,564cc DOHC 엔진은 최고출력 258마력을 뿜어낸다. 마력 당 무게비는 6.7kg. 스포츠카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달릴 수 있는 힘이다.
윈도 프레임은 얇다. 언뜻 보면 프레임이 없는 것 같다. 그 얇은 프레임으로 올라가는 유리창에 손가락이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차에는 차창이 닫히다가 장애물이 걸리면 도로 내려가는 안전장치가 없다.
시속 140km를 넘기면서는 윈드실드에 부서지는 바람소리가 파도친다. 속도가 높아지며 주변 소음이 커지면 오디오 볼륨도 자동으로 따라서 커진다. 정신없이 달리다 번쩍 정신을 차려 보면 온통 ‘소음의 도가니’임을 느끼게 된다.
시속 100마일(160km/h)를 넘기면 경고음이 울린다. 고속이니 주의하라는 뜻이리라. 그 후로도 속도는 충분히 더 올라갔다. 빨리 달리지 못한다는 불만은 없겠다. 필요한 만큼, 충분히 빨랐다.
하지만 어딘지 허전하고 낯설다. 덩치가 커서 넉넉한 공간을 가졌다는 것 말고는 딱히 ‘이거다’라고 할 만한 매력을 찾을 수 없다. 매그너스보다 스테이츠맨이 훨씬 좋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꼭 그런 게 아니어서 곤혹스럽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호주다. 정확히는 호주의 자동차, 호주의 자동차산업이다. 과연 한국이 호주의 차를 들여다 최고급 승용차로 팔아야 할 처지인가. 반대로, 과연 호주가 그 만큼 자동차 선진국인가. 적어도 기자의 판단으로는 한국이 호주보다 한 수 위다. 산업의 규모나 질, 소비자의 입맛 등에서 모두 그렇다.
라인업에서 대형 승용차가 없는 GM대우가 스테이츠맨을 선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점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소비자의 입맛’을 간과한 건 아닌 지 돌이켜 볼 일이다. 가끔 너무 많은 변수를 고려하고 판단하다 보면 절대 양보해선 안되는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생긴다. 스테이츠맨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경제성
스테이츠맨은 V6 2.8과 V6 3.6 두 종류다. 각각 3,995만원과 4,995만원이다. 국산차메이커가 수입하는 외제차라는 특이한 위치여서 비교의 대상을 국산 대형차로 잡아야 할 지, 동급 수입차로 잡아야 할 지는 각각의 처지에서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동급차보다 경제성이 앞선다고 할 수는 없을 듯 싶다. 가격만으로 보면 에쿠스 3.5와 일부 겹치긴 하지만 비슷한 가격대의 모델끼리 놓고 보면 편의사양, 장비 등의 면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포드 500이 4,000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팔린다. 스테이츠맨이 가격대를 조금 높게 잡은 건 아닌 지 아쉬운 생각이 든다.
시승 / 오종훈 기자 ojh@autotimes.co.kr
사진 / 권윤경 기자 kwon@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