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길을 물어 그 곳을 찾아갔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괴시리 고택. 나른한 햇볕이 툇마루 끝에서 졸고 있고, 머리를 곱게 다듬어 올린 세월들이 한데 모여 수런거리는 그 곳. 동네는 텅 비어 있었다. 인적도 드물다. 토담을 따라 이어지는 골목길로 접어들어도 마주치는 이 하나 없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대문없는 집 울안으로 들어서면 왈칵 덤벼드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눈을 찌른다.
|
| 괴시종택 |
200여년 된 고가옥들이 머리를 맞댄 괴시리 전통마을은 영양 남 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그다지 널리 소문난 곳이 아니라 처음 찾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내륙이 아닌 바닷가 근처에 어떻게 양반마을이 형성되었을까’
|
| 봄꽃이 아우성치는 정원 |
그 건 모르는 말씀이다. 영해는 예부터 양반고을로 손꼽혔다. 조선말까지 영덕보다 큰 고을이었다. 영주, 봉화, 영양 등 주변의 산악지대와 달리 강릉과 함께 동해안에서 가장 너른 평야를 거느린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곡식과 어물이 풍부한 이 곳은 자연스럽게 세도가들의 터전이 됐다.
‘괴시리’라는 마을이름은 고려 때의 충신 목은 이색과 관련있다. 고려말의 훌륭한 재상이자 대 사상가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대표하는 목은 선생은 괴시리가 외가이자 태어난 곳이다. 공민왕 8년 때 목은 선생과 교분이 두터운 중국 사신이 이 곳에 와서 마을 형상을 보고 중국 괴시와 비슷하다하여 괴시라 칭하게 됐다.
|
| 목은 유허비 |
400여년간 영양 남 씨가 세거를 누렸던 이 곳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나고 빈집이 늘어가면서 마을은 점점 허물어졌다. 반듯했던 지붕은 서까래가 내려앉았고, 문짝이 뜯겨져나간 집들은 폐가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다행히 경북도청과 영덕군이 괴시리를 전통마을로 지정해 지금은 말끔히 복원됐다.
300여년이 된 괴시종택을 비롯해 조선후기의 물소와고택, 해촌고택 등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곳 말고도 고택이 즐비한 괴시리는 반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경북지방 양반가의 주택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곳 고택들은 모두 ‘ㅁ’자형 구조를 갖춘 게 특징이다.
|
| 영은고택 |
영양 남 씨 괴시파의 종택은 17세기말 건립된 건물로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됐다. 정침은 사람이 거처하지 않고 제사 등을 올리는 몸체 방을 말한다. 정면 8칸, 측면 5칸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 다만 사랑채 부분이 오른쪽으로 3칸 돌출돼 있어 한쪽 날개집의 평면형을 취하고 있다. 수차에 걸친 보수로 인해 배치와 평면 상에 다소의 변형은 있으나 조선후기 주택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옥이다.
물소와고택은 사대부들의 사랑채와 아낙네들의 안채를 완전히 분리시킨 건물 양식이 요즘 시각으로 보면 이채롭다. 조선조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이 건립한 물소와고택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정침과 고방, 중문, 사랑 등으로 이뤄진 조선후기 주택양식의 전형적 건물이다. 당시의 유교적 윤리에 의해 남녀의 생활공간이 엄격히 분리돼 있다. 골목에서 바깥마당으로 출입할 때 사랑채 정면이 여성에게 노출되는 걸 방지하고, 사랑마당 오른쪽 구석에 있는 우물에서 여성이 가사작업할 때 노출되는 걸 고려해 중문간 앞에 담벽을 쌓아 놓았다.
|
| 고택에 붙은 현판 |
이 밖에도 팔작지붕의 영은고택,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된 해촌고택,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경주댁과 천전댁 등은 우리 고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에 관련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굳이 전공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 괴시리에 깃든 고요한 아름다움과 흐트러짐없는 품격은 스쳐지나던 나그네의 발길도 오래오래 붙잡을 만큼 매혹적임을.
*가는 요령
|
| 토담으로 이어진 골목 |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나와 안동에서 국도 34번을 타고 청송·영덕 방향으로 향한다. 진보-영덕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울진 방면으로 가면 영해 4거리. 이 곳에서 대진항 방면 12번 군도를 따라가면 괴시리로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
| 해촌고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