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량별로 세금을 부과하는 국내 자동차세금체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세금을 부과할 때 배기량뿐 아니라 판매가격도 반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시민단체의 주장에 미국이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일부 시민단체의 요구를 ‘통상압력’의 이유로 거절해 왔던 정부로선 난감한 상황이다. 그러나 정부는 현재 자동차세제 개편에 대해선 전혀 검토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이 자동차 FTA를 추진하면서 국내 자동차세금체제를 바꾸자고 한 건 물론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다. 미국은 현재 배기량별로 부과되는 국내 자동차세를 가격 기준으로 바꿀 경우 상대적으로 가격은 낮고 배기량이 큰 미국산 자동차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가격 기준으로 변경되면 판매확대를 위해 저가형의 대 배기량 차종을 집중 투입, 차종 다양화를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관세 8% 인하에 따른 가격경쟁력 확보와 동시에 유지비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복안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미국의 주장이 그 동안 줄기차게 자동차세를 배기량과 가격의 합산과세로 부과해야 한다는 국내 일부 시민단체의 논리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동차10년타기운동본부 임기상 대표는 “같은 2,000cc급 승용차를 두고 볼 때 국산차와 수입차의 판매가격 차이는 두 배를 넘지만 자동차세가 같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자동차의 경우 재산적 가치가 담겨 있는 소비재라는 점에서 과세 기준으로 판매가격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가격과 배기량, 차령 등을 감안한 합산과세가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소비자문제를연구하는시민의모임(이하 소시모)의 김자혜 사무총장도 “근본적으로 국내 자동차에 부과되는 세금은 과도하다”며 “값싼 차의 세금이 적고, 비싼 차는 세금을 많이 내도록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단호하다. 한국과 미국의 자동차부문 FTA를 담당하고 있는 외교통상부 북미통상과 관계자는 “자동차관련 세제 개편을 요구하는 미국의 입장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방안은 확고하다”며 “자동차세의 폐지는 물론 변경도 안된다는 게 기본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시민단체의 합산과제 주장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구에 앞서 국내에서 논란이 됐던 세금체계 변경과 관련해 여러 방안을 검토해 본 적은 있다”면서도 “어쨌든 공식 입장은 변경 불가”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그 동안 국내에서 자동차세금체계의 변경요구가 나올 때마다 값비싼 수입차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상마찰 소지가 발생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미국의 압력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고수해 왔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이 세금체계를 바꾸자고 요구하자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통상마찰의 명분이 한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정부가 자동차세금체계에 변화를 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자동차와 관련한 세금의 징수주체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재정경제부가 부과하는 특별소비세와 행정자치부가 소관하는 등록세 및 취득세 그리고 환경부가 추징하는 환경부담금 등 자동차를 두고 각 부처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적지 않다는 것. 이에 따라 세금을 통합하거나 변경할 경우 세수에서 손해 또는 이익을 보는 부처가 나올 수 있고, 이는 곧 부처 간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변경불가의 가장 큰 이유로 보고 있다.
자동차업계를 대변하는 한국자동차공업협회도 12개 항목에 달하는 국내 자동차세금의 개편 또는 세율 인하를 줄기차게 강조해 왔다. 그럼에도 정부의 변경불가 입장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오랜 기간 관행처럼 자리잡은 세제를 통째로 흔들어봐야 시끄럽기만 할 뿐 별로 얻을 게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어쨌든 미국의 자동차세제 개편 요구는 국내에서도 그 동안 개선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 사안이어서 향후 정부의 대응이 주목된다.
권용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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