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버는 유럽 SUV의 명가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평원을 누비는 랜드로버 디펜더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모습이다. 유럽 최고의 오프로더로 미국의 짚과 쌍벽을 이루는 게 랜드로버다.
랜드로버 가문의 맏형, 즉 플래그십카는 레인지로버다. 그 중에서도 도심형 SUV로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는 모델이 레인지로버 스포츠다. 정통 오프로더로 명성을 쌓은 랜드로버지만 도심형 SUV들이 인기를 얻는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랜드로버의 이미지를 간직하면서 도심지향적인 최고급 SUV로 내놓은 게 레인지로버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레드와인 컬러가 환상적인 레인지로버 스포츠를 만났다.
▲디자인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찢어진 앞바퀴 펜더 부분이 눈길을 잡는다. 앞, 옆, 뒤로 돌아가며 차를 보는 의례적인 움직임은 이 곳에 눈이 멎는 순간 흐트러진다. 일상에서 살짝 벗어난 파격이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균형을 깬다거나 전체 모양에 부담을 주는 건 아니다.
공기저항을 고려해 부분적으로 곡선을 디자인에 도입하는 등의 신경을 썼으나 그래도 크게 보면 기존 레인지로버의 디자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직선을 주로 사용한 디자인은 자신감 넘치는 당당함을 과시한다.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다.
과감한 컬러를 도입한 점도 일종의 파격이다. 대형 SUV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빨간 계통의 차체 색상이 잘 어울린다. 차분한 컬러의 자동차가 대다수를 이루는 한국의 도로에서 단연 튀는 색이다.
실내에선 탁 트인 시야가 마음에 든다. 인테리어는 개성이 넘친다. 가죽시트와 고급 무늬목으로 마무리한 인테리어는 럭셔리 SUV의 기본. 여기에 독일의 명품 오디오메이커 하만카돈의 7.1 디지털 서라운드 오디오 시스템이 더해져 품격을 높여준다. 모니터로는 내비게이션 지도를 볼 수 있는가하면 네 바퀴의 동력전달 상태를 확인할 수도 있다. 모니터 아래로 변속레버까지 수많은 버튼들이 나열됐다. 오디오와 CD, 공조장치 등에 조작버튼들이 많고 변속레버 주변에도 여러 버튼들이 있다. 진흙길, 초지, 바윗길 등에 맞게 구동력을 배분하도록 각 모드에 맞게 조절하는 버튼들이다. 오프로드 초보자들도 쉽게 조작할 수 있다.
리어 게이트는 위아래로 나뉘어 열린다. 아랫 부분을 열고 걸터 앉으면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성능
레인지로버 스포츠의 V8 엔진은 배기량 4.4ℓ에 300마력의 최고출력을 낸다. 가속 페달을 툭 건들면 "웅"하는 소리의 폭이 크고 넓다. 자연흡기의 대배기량 엔진은 이렇게 공회전부터 맛이 다르다.
0→시속 100km 가속시간이 8.9초. 빠른 건 아니다. 300마력짜리 엔진이라면 좀 더 빠른 속도를 기대할 수 있으나 이 차는 스포츠 세단이 아닌 SUV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힘있게, 멋있게, 안정적으로 달리는 게 어울리는 차다. 게다가 몸무게가 2.5t에 달하는 거구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중량감이 느껴진다. 변속은 부드럽게 이뤄져 그 타이밍을 느끼기기가 쉽지 않다. 배기량이 큰 만큼 엔진을 거칠게 몰아부치지 않아도 고성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낮은 rpm에 고속질주가 가능한 것. 온로드 지향으로 만들었다는 이 차는 휠베이스가 기존 레인지로버보다 14cm 짧다. 휠베이스가 짧으면 운동성능이 좋아진다. 회전반경도 짧아지고 차를 움직이기 편해진다.
고속주행을 하면 에어 서스펜션이 차의 높이를 살짝 낮춰준다. 빨리 달리는 데 적합하게 차의 자세를 조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오프로드에서는 차 높이를 높게 세팅할 수 있다.
6단 자동변속기는 일반 모드와 스포츠 모드가 있다. 여기에 로 모드도 있다. 일반주행, 초지, 모랫길, 눈길, 바윗길, 사면로 등 다양한 조건의 오프로드 모드를 선택할 수 있어 변속기의 조합은 일일히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각 모드의 차이를 실제 체험하면서 주행할 수 없었던 게 아쉬움이다. 다만 오프로드에서 이 차의 진가는 다시 한 번 빛났다. 온로드 지향으로 차를 만들었다고는 하나 랜드로버 가문의 피를 속일 수는 없었다. 노면이 꽤 미끄러운 오프로드 경사로를 헛바퀴 한 번 구르지 않고 야무지게 올랐다. 고수의 여유를 느꼈다. 힘도, 차의 자세도, 엔진의 반응도 충분히 여유가 있다.
‘내리막길 주행장치(Hill Descent Control)’를 작동하면 내리막길에서는 로 모드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급한 내리막길에서도 기어 1단 상태로 브레이크 페달이 아닌 가속 페달에 살짝 발을 얹고 내려가는 스릴을 즐길 수 있다. 스릴이라고는 하지만 노면을 단단히 붙들고 천천히 구르는 타이어의 구동력을 느끼는 순간 차에 대한 깊은 신뢰감이 생긴다.
고속주행에서 차창을 파고드는 바람소리는 이 차의 체형 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공기와 맞닿는 단면적이 큰 만큼 감수해야 할 일이다.
▲경제성
레인지로버는 "SUV의 롤스로이스"로 불린다. 그 만큼 고급스럽다는 말이다. 최고의 럭셔리 세단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롤스로이스처럼 레인지로버도 SUV 중에서는 최고급이다. 다양한 기능, 고급스런 인테리어, 가격 등이 모두 이를 반증한다. 판매가격은 1억500만원. 랜드로버의 최고급차종에 맞는 가격이다. 레인지로버라는 이름값이 1억원을 넘기게 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랜드로버는 대중 브랜드가 아니다. 많이 만들어 많이 파는 차라면 가격을 좀 더 융통성 있게 조절했겠지만 시장폭이 좁은 만큼 고집을 부린 가격이라고 봐야 하겠다.
연비는 6.0km/ℓ로 지갑이 얇은 사람은 거저 줘도 엄두를 못낼 수준이다. 무게도 줄이고 엔진도 효율적으로 세팅하면 연비를 훨씬 좋게 만들 수 있겠지만 이 차에서 경제성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시승 / 오종훈 기자 ojh@autotimes.co.kr
사진 / 권윤경 기자 kwon@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