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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년 고택 지례예술촌. |
들을 지나고, 과수원을 지나고, 깨밭을 지나고…. 이제 길은 굽이굽이 첩첩산중으로 이어집니다. 호젓한 산길이 낯설어 휘휘 둘러보면 키 큰 전봇대가 말없이 따라옵니다. 아, 말없는 동행자는 또 있습니다. 때론 높게 때론 낮게 눈높이를 맞춰주는 맑은 눈빛의 하늘과 슬쩍 모자를 벗기고 달아나는 장난스런 바람. 가을을, 그곳에서 맞고 싶었습니다. 도심에선 좀체 느낄 수 없는, 가을의 내밀한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는, 소슬한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좀 쓸쓸하고 외롭다싶게….
‘그대 / 구월이 오면 / 구월의 강가에 나가 /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 뒤따르는 강물이 / 앞서가는 강물에게 /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 물결로 출렁 / 걸음을 옮기는 것을 // 그때 강둑 위로 /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 가는 것을 // 그대 /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 강물이 저희끼리만 /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 우리 사랑도 //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 그대 / 사랑이란 /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 우리도 /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 구월이 오면 / 구월의 강가에 나가 /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 강물이 되어 /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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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촌종택. |
안도현의 시 <9월이 오면>을 이 곳, 임하호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지산서당 툇마루에 앉아 가만히 읊조려 보시길. 발목을 간질이다가 가슴을 치고 목까지 차오르는 그 순결한 가을이 온몸으로 느껴지리라.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 자리잡은 지례예술촌은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마을이다.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가 수몰될 처지에 놓이자, 수몰지에 있던 의성 김씨 지촌파의 종택과 서당, 제청 등 건물 10여채를 마을 뒷산 자락에 옮겨 지었다. 조선 숙종 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 김방걸 선생의 13대 종손이자 현 지례예술촌 촌장인 김원길 씨가 1986년부터 3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이룬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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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밭을 지나고…. |
그 뒤 김 촌장은 400년된 고택을 전시물로 두지 않고 예술인들을 위해 개방, 1990년에 문화부로부터 예술창작마을로 지정받아 예술인들의 창작과 연수공간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의 산실로만 염두에 뒀지만, 안동의 전통가옥과 양반문화의 정수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고 있다.
대문 밖으로는 임하호가, 집 뒤로는 일월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지례예술촌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 그 고요함 속에 깃든 우아하고 예스런 멋을 고스란히 만끽할 수 있다. 일부러 느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루 끝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지나가는 것이 모두 그대로의 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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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 밖엔 임하호가 펼쳐진다. |
새소리, 벌레소리를 들으며 푸른 산과 호수를 마냥 바라보는 것, 호수위로 번지는 물안개가 소리없이 몸을 감출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기, 맨발로 잔디마당을 오가며 책을 읽거나 그러다 무료하면 낮잠 자기…. 밤하늘의 은하수에 감탄하거나 흐린 밤이라 별을 보지 못하면 칠흑의 어둠이 무엇인지 체험하기….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 모든 걸 즐긴다. 더러는 낚시나 바둑도 하고, 서예도 하고, 음악연주도 한다. 산책길에 오디, 산딸기, 감, 밤같은 걸 따오기도, 어린이들은 잠자리채를 들고 나가 곤충채집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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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 안을 들어서면…. |
자연 그대로의 삶,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체험할 수 있는 지례예술촌을, 땀 흘려 만들고 가꾸느라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는 김 촌장은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이 깊은 산중에 와서 구태여 도시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지 마십시오. TV도, 전화도, 벽시계도 없는 방에서 정지된 시간과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느껴보십시오. 지례예술촌은 현대인에게 잃어버린 고향과 한국인의 원형질을 되찾게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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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곡강당 대청서재. |
*지례예술촌 : 전화 054-822-2590 / 팩스 054-857-2590(낮), 054-823-2590(밤) (홈페이지 : www.chirye.com )
*안동시청과 지례예술촌에서 주관하는 탈춤, 국악 등 각종 공연과 문화강좌, 제사 등을 참관하려면 예약 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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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산서당 툇마루. |
*가는 요령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나 남안동 IC에서 빠져 안동 - 영덕 방향 34번 국도를 탄다. 약 30km 가면 가랫재휴게소가 나오는데, 이후 지례에술촌 표지판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그래도 길 찾기에 자신이 없다면 가랫재휴게소에서 예술촌 약도를 청하면 더 확실하다. 예술촌이 가까워지면 1차로 좁은 산길이 펼쳐지므로 마주 오는 차가 없는 지 확인하고 출발하는 게 좋다. 운전이 서툰 이들은 자칫 좁은 산길을 후진해야 하는, 진땀 빼는 경우가 생길 지 모르기 때문이다.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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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산서당. |
지례예술촌은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깊은 산중이라 음식점이나 상가는 전혀 없다. 대신 지례예술촌에서는 안동지방의 전통반가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단, 미리 전화해서 예약한 경우에 한함. 그 밖에는 안동시내로 나오거나 도중의 임하댐 주변의 맛집을 이용해야 한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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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속으로 이어지는 외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