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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볕이 침묵의 시간을 깨운다 |
왜 그 날 그 곳에 서 있게 됐는 지…. 곰곰히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국도 28번을 타고 포항쪽으로 달리던 중이었는 지, 아님 대구쪽으로 나가던 길이었는 지, 중앙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왜 국도 주변서 어슬렁거렸는 지…. 그런 질문에도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게 우연이었다고 해두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은 그 곳에 서 있었고, 들판에 흩어져 있는, 심상치 않은 그 고분군 앞에서 저도 몰래 발길이 멈춘 것 뿐이었노라고만 하자.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탑리리·학미리 일대였다. 넓은 들판 이곳저곳에 흩어진 동산같은 무덤들이 창창한 가을볕을 받으며 수굿이 엎드린 모습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시간의 바늘이 한순간 휙 돌려지는 듯한 착각.
조선시대, 고려를 거슬러 천년 세월을 뛰어넘더니 시간은 통일신라와 삼국시대 이전으로 훌쩍 건너간다. 아득한,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 시절이었을까.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기 전, 옛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인 조문국이 이 곳 금성산 아래 비옥한 토지와 하천을 끼고 도읍을 삼았다. 신라 벌휴왕 2년(185)에 신라의 영향권으로 편입됐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역사에서 사라진 조문국은 훗날 한 학자의 문집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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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아한 5층석탑 |
조선 숙종 때 학자 허미수의 문집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현재의 능지는 오극겸이라는 사람의 외밭이었는데,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내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이니 속히 철거하라"고 이르고는 외지기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이 일어나보니 꿈 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의성 현령께 고하자, 현령은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해 봉분을 만들고 매년 춘계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28번 국도변에 있는 금성산고분군 일대는 최근 말끔히 단장됐다. 경덕왕릉을 중심으로 주변 40여기의 고분을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와 휴게소, 중앙광장 등이 마련됐고, 문익점 면작기념비도 함께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더러 신라 경덕왕릉으로 착각하는 이도 있으나 이 곳에 있는 능은 삼한시대 조문국의 경덕왕릉이다. 전통적인 고분의 모습을 한 능은 봉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으며, 능의 크기는 둘레 74m, 높이 8m로 경주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능들보다는 작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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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돌려놓는 고분군 |
짧은 가을 해가 머뭇거리다가 능역 위로 떨어질 때면 능역을 에워싼 소나무숲이 긴 잠에서 깨어난다. 능을 지키는 문인석의 얼굴에 햇볕이 잠깐 머물자 금방 화색이 돌며 숨결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능역의 아스라한 고요를 바람이 살짝 흩어놓는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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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점 면작기념비 |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박재삼의 시 <천년의 바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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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조성된 공원 일대 |
*주변 볼거리
금성산고분군 입구에 ‘문익점 선생 면작기념비’가 있고 요즘 보기 드문 목화밭이 가꿔져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귀국할 때 면화씨를 붓통에 넣어 왔던 게 우리나라에 목화솜이 재배된 시초다. 경남 산청에 시험재배한 게 처음이나 조선 태종 때 문익점의 손자가 의성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면화를 파종한 걸 기념해 세운 비다.
고분군에서 5분 정도 가면 탑리 5층석탑이 있다. 국보 77호로 지정된 탑리 5층석탑은 통일신라 때의 탑으로 단아한 멋이 돋보인다. 높이 9.6m로, 전탑의 수법을 모방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 데 귀중한 유례가 되는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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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문국 경덕왕릉 |
*가는 요령
중앙고속도로 의성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927번 지방도로를 탄다. 국도 28번과 만나는 3거리에서 좌회전해 탑리읍내로 들어가면 옛 면사무소 언덕 자리이며, 탑리여중 건너편에 5층석탑이 보인다. 금성산고분군은 탑리에서 의성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왼쪽으로 면작기념비와 새로 조성된 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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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색이 도는 문인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