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역에 감도는 가없는 효심

입력 2006년12월15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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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의 효행길(능행길) 100리를 따라 달리는 길은 용주사에서 융건릉으로 이어진다. 융건릉(隆健陵 사적 206호)은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현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健陵)을 말한다. 용주사에서 1.5km쯤 가면 3거리 우측에 깊은 숲을 거느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잠들어 있다.

건릉


정조임금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늘 가슴 아파하다가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추도하는 일을 벌인다. 시작은 정조 13년인 1789년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능을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다는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릉원이라 부르게 했다. 이 현릉원은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됐다.



그 다음에는 화성을 축조하는 공사를 벌였다. 수원을 아버지 묘소 현릉원을 보호하는 읍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묘소를 자주 찾게 되면 행궁도 있어야 했기에 성곽을 축성하게 됐고, 또 심한 당파싸움에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며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되찾기 위함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실학사상으로 다져진 자신의 학문을 정치로 널리 실천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을 품고 수원에 새로운 수도 건설을 꿈꿨다.



겨울숲에 깃든 따스함
정조임금의 이러한 포부로 수원은 새로운 도시로 변모했다. 정약용과 실학자들이 힘을 합쳐 축조한 수원 화성은 당대 최고의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이 총동원됐다. 1794년부터 약 2년6개월동안 축조된 화성은 조선 건축예술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정조임금의 효행은 ‘화성능행도’라는 궁중기록화에 잘 나타나 있다.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자 정조임금은‘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묘소에 가서 참배도 드리고 회갑연회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두 분이 동갑이어서 어머니의 회갑은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갑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조 22년(1798)에 기록된 ‘화성능행도’를 보면 정조임금이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창덕궁을 출발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릉원에 성묘하고, 수원 화성에서 혜경궁께 진찬례를 베푼 후 다시 궁으로 돌아오기까지 8일동안의 일들이 깨알같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융건릉 앞 음식점


정조는 생전에 선친의 묘 곁에 자신의 묘를 써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정조임금의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가득한 융건 능역에 들어서면 300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그 가없는 효심이 겨울바람을 잠재우며 머무는 듯하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모두 서향이라 해질 녘의 능 분위기는 더욱 그윽하고 깊은 느낌을 안겨준다. 혹 눈이라도 내리면 이 곳은 더욱 별세계다. 화성 사람들은 이 숲에 눈 내린 경치를 ‘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 하여 화성의 대표적인 여덟 경치 중 첫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운치있다.



융릉
눈은 내리지 않았으나 하늘을 가린 송림과 발 아래 빈틈없이 낙엽을 깔고 있는 갈참나무숲은 말할 수 없는 깊은 여운을 던진다. 산책로를 따라 능역을 거닐다보면 ‘역사’와 ‘오늘’은 잠시 미뤄두고 비명에 간 아비를 그리는 아들의 애끊는 효심이 새삼 가슴을 뜨겁게 덥혀 온다.



*가는 요령

서울과 오산을 잇는 1번 국도의 태안읍 병점육교에서 서쪽으로 4km 정도 가면 안용중학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용주사 진입로가 나온다.



살얼음이 낀 능역의 개울
수원에서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국도 1번을 타고 병점(4.6km)을 지나 정남 방면 84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해 6.6km 가면 용주사 주차장에 이른다. 이 곳에서 약1.5km 더 가면 3거리 우측에 융건릉 주차장이 나온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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