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임금의 효행길(능행길) 100리를 따라 달리는 길은 용주사에서 융건릉으로 이어진다. 융건릉(隆健陵 사적 206호)은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현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健陵)을 말한다. 용주사에서 1.5km쯤 가면 3거리 우측에 깊은 숲을 거느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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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릉 |
정조임금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늘 가슴 아파하다가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추도하는 일을 벌인다. 시작은 정조 13년인 1789년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능을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다는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릉원이라 부르게 했다. 이 현릉원은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됐다.
그 다음에는 화성을 축조하는 공사를 벌였다. 수원을 아버지 묘소 현릉원을 보호하는 읍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묘소를 자주 찾게 되면 행궁도 있어야 했기에 성곽을 축성하게 됐고, 또 심한 당파싸움에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며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되찾기 위함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실학사상으로 다져진 자신의 학문을 정치로 널리 실천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을 품고 수원에 새로운 수도 건설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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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숲에 깃든 따스함 |
정조임금의 이러한 포부로 수원은 새로운 도시로 변모했다. 정약용과 실학자들이 힘을 합쳐 축조한 수원 화성은 당대 최고의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이 총동원됐다. 1794년부터 약 2년6개월동안 축조된 화성은 조선 건축예술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정조임금의 효행은 ‘화성능행도’라는 궁중기록화에 잘 나타나 있다.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자 정조임금은‘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묘소에 가서 참배도 드리고 회갑연회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두 분이 동갑이어서 어머니의 회갑은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갑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조 22년(1798)에 기록된 ‘화성능행도’를 보면 정조임금이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창덕궁을 출발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릉원에 성묘하고, 수원 화성에서 혜경궁께 진찬례를 베푼 후 다시 궁으로 돌아오기까지 8일동안의 일들이 깨알같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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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건릉 앞 음식점 |
정조는 생전에 선친의 묘 곁에 자신의 묘를 써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옆에 정조임금의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가득한 융건 능역에 들어서면 300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그 가없는 효심이 겨울바람을 잠재우며 머무는 듯하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모두 서향이라 해질 녘의 능 분위기는 더욱 그윽하고 깊은 느낌을 안겨준다. 혹 눈이라도 내리면 이 곳은 더욱 별세계다. 화성 사람들은 이 숲에 눈 내린 경치를 ‘융건백설(隆健白雪)’이라 하여 화성의 대표적인 여덟 경치 중 첫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운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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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릉 |
눈은 내리지 않았으나 하늘을 가린 송림과 발 아래 빈틈없이 낙엽을 깔고 있는 갈참나무숲은 말할 수 없는 깊은 여운을 던진다. 산책로를 따라 능역을 거닐다보면 ‘역사’와 ‘오늘’은 잠시 미뤄두고 비명에 간 아비를 그리는 아들의 애끊는 효심이 새삼 가슴을 뜨겁게 덥혀 온다.
*가는 요령
서울과 오산을 잇는 1번 국도의 태안읍 병점육교에서 서쪽으로 4km 정도 가면 안용중학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용주사 진입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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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얼음이 낀 능역의 개울 |
수원에서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국도 1번을 타고 병점(4.6km)을 지나 정남 방면 84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해 6.6km 가면 용주사 주차장에 이른다. 이 곳에서 약1.5km 더 가면 3거리 우측에 융건릉 주차장이 나온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