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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할 만큼 섬 전체가 모두 볼거리이자 구경거리다. 처음 강화도를 찾는 사람들은 그래서 어디로 먼저 가야 할 지 잠깐 망설이게 된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1순위로 정하는 곳이 전등사다. 그야말로 강화도의 대표선수(?)인 셈이다.
주말이면 몰려드는 사람들로 전등사 주차장은 승용차와 관광버스로 넘쳐난다. 동, 서, 남쪽 세 곳으로 분산시켜 놓은 주차장이 모두 차들로 가득할 정도다.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 안에 위치한 전등사는 창건연대가 확실치 않다. 중창기문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기록돼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다만 고려 왕실의 원찰로 한 때 진종사라 불렸다. 지금의 이름인 전등사로 개칭한 건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傳燈寺)라 고쳐 불렀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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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내부. |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약사전을 비롯해 10여동의 건물과, 중국 북송 때 만들어진 범종(보물 393호) 등 문화재가 즐비해 고찰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보다 전등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은 대웅전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 추녀를 받들고 있는 나신상에 쏠린다. 이 벌거벗은 여인상을 보는 게 마치 파리 노틀담 성당의 한 귀퉁이 곱추상을 찾아보는 것처럼 관광거리가 됐다.
설화에 따르면, 광해군 때 이 법당을 지었던 도편수(都片手)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가 불사(佛事)에만 전념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렸다.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기둥 위에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해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세세생생 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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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신상. |
한 때 전등사에서 스님으로 있었던 고은 시인의 <전등사>에도 이 전설이 들어가 있다.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은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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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부전과 약사전. |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 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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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단풍나무가 있는 절마당. |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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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족산성 남쪽입구. |
그 전설에 푹 빠져든 때문일까. 사람들은 벌거벗은 여인상만을 찾아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웅보전을 떠난다. 이는 조선 중기 건축물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대웅보전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순간이다. 눈여겨 보면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천장은 용·극락조·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됐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다. 또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을 보면 곳곳에 이름들을 써놓은 흔적들이 보인다. 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대항해 싸움에 나가야 했던 병사들이 부처님께 무운을 빌며 자신의 기록을 남겨 놓은 것들이다.
*가는 요령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김포 인터체인지에서 나가 48번 국도를 타고 김포 - 강화대교 - 강화읍에 이른다. 강화읍에서 이정표대로 움직이면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전등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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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찻집 죽림다원. |
*맛집
강화읍내 중앙시장 안에 있는 우리옥(032-934-2472)은 가정식 백반을 잘하기로 소문난 집.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변하지 않는 손맛을 지켜 오고 있다. 가마솥에 지은 고슬고슬한 쌀밥에 콩비지찌개, 순무김치를 곁들인 10여가지의 밑반찬엔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아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보인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