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보험과 '초기값 효과'

입력 2007년02월28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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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사면 판매업체가 입력해둔 초기설정 그대로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대부분이다. 쓰면서 설정을 일부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도 하지만 초기설정을 변경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혹시 고장이라도 날까봐 섣불리 손대지 않으려는 심리가 작용하거나, 업체가 설정한 게 가장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는 초기설정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기술한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주어진 상황 A와 B 중 어느 게 초기값(설정)이 되느냐에 따라 사람의 선택이 달라진다. 이를 "초기값 효과"라 부른다.

15년 전 미국의 자동차보험시장에서는 초기값 효과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뉴저지와 펜실베니아에서는 두 종류의 자동차보험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는 보험료는 싸지만 보험범위가 한정됐고, 다른 하나는 보험료는 비싸지만 적용범위가 넓었다. 뉴저지의 경우 자동차 소유자가 보험료가 싼 보험에 자동적으로 가입하는 걸 초기설정으로 두고 보험료를 추가로 내면 적용범위가 넓은 보험으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이 때 뉴저지 자동차보험 가입자의 80%는 초기설정이 저렴한 보험을 선택했다. 펜실베니아의 경우 반대로 보험료가 비싼 보험에 자동 가입하는 걸 초기설정으로 한 뒤 가입자가 원하면 보험료가 싼 보험으로 변경할 수 있게 했다. 펜실베니아의 가입자 75%는 보험료가 비싼 보험을 골랐다.

일본의 행동경제학자 도모노 노리오는 이를 두고 사람들은 초기값을 물건 파는 사람의 ‘권유’로 생각하면서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어떤 게 좋은 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초기값을 바꾸는 수고를 하지 않고, 초기값을 줄이면 ‘손해’를 볼 것 같아 피하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도 여기에 한 몫 한다고 풀이했다.

기업들은 이 같은 소비자들의 심리와 행동을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업체들이 기본사양에 추가로 옵션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풀옵션을 지향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 자동차보험시장에서도 초기값 효과를 볼 수 있다. 자동차보험에 새로 또는 다시 가입해야 하는 소비자에게 보험사나 보험대리점 콜센터 직원들이 보내주는 자동차보험료 견적이 바로 그 예다. 보험사나 대리점은 소비자의 별다른 요청이 없는 한 대인, 대물, 자기신체손해 등의 가입한도를 임의로 설정한다. 이 중 대물배상 가입한도는 2003년까지 가입한도 2,000만원, 3,000만원, 5,000만원, 1억원 중 초기값으로 2,000만원이나 3,000만원을 설정하는 게 대세였다. 자동차보험 가입자 유치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보험사나 대리점들이 조금이나마 보험료를 낮춰 가입자들의 눈길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004년부터 고액한도인 5,000만원이나 1억원을 초기값으로 설정하는 곳들이 점차 늘어나더니 지난해부터는 1억원이 대세가 됐다.

보험업계는 이에 대해 수입차 등 고급차가 많아져 2,000만~3,000만원으로는 충분한 사고보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2,000만원과 1억원의 보험료 차이는 1년에 1만원 안팎에 불과해 적은 비용으로 높은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보험사나 대리점 상담원들도 소비자들에게 두 가지 이유로 고액한도 가입을 ‘권유’한다. 그 이후 고액한도 가입자는 크게 늘었다. 2003회계년도까지 2,000만~3,000만원 가입자는 전체의 84.1%로 절대 다수였으나 2006년회계년도에는 5,000만~1억원 가입자가 50.8%로 2,000만~3,000만원 가입자를 따돌렸다.

사실 초기값으로 고액한도를 설정한 게 소비자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좋은 상품을 소비자들이 별다른 고민없이 편리하게 선택할 수 있어서다. 또 만일 발생할 지 모르는 고액사고를 1만원 안팎의 추가 비용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운전지역 등 자신의 상황에 비춰 과도하게 설정한 건 아닌 지 짚어볼 필요는 있다. 대물배상 사고 중 3,000만원을 넘는 사고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또 고액 대물배상한도를 택해야만 하는 진짜 원인을 잊어선 안된다.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된 수입차 수리비를 정부와 보험사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결과, 대물배상 사고 때 비싼 수리비를 부담해야 하는 ‘진짜 원인’을 보험사가 가입자들의 대물 한도 인상으로 떠넘기는 건 아닌 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보험사들은 1만원 안팎 비싼 고액한도를 초기값으로 설정하면서 매년 수백억원이 넘는 ‘불로소득’을 거두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운행되는, 즉 자동차보험에 반드시 가입해야 하는 자동차가 1,600만대나 돼서다.

21세기는 소비자들이 편리하게 상품을 사고 팔 수 있도록 기업들이 힘을 쏟는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소비자 스스로 꼼꼼히 따지는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무심결에 손해를 보면서도 그 것을 깨닫지 못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최기성 기자 gistar@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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