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 속에 잠든 천 년 세월의 외교력

입력 2010년03월26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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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과 신도비
눈 내리고 바람 불고…. 연일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봄 꽃소식을 대신하고 있다. 그야말로 요즘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음을 실감케 한다. 변덕스런 날씨 속에도 봄은 오고 있으리라. 가득 모여 움트고 있을 봄소식을 찾아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의 해여림식물원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곳 역시 날씨 탓일까. 문이 굳게 잠겨 있다. 4월 중순에 오픈한다는 안내문 한 장만이 달랑 붙었다. 봄을 만나기가 역시 쉽지 않다. 허탈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자그마한 푯말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고려 때 거란의 80만 대군을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942~998) 선생의 묘를 알리는 푯말이다. 바로 근처였다.

눈이 소복한 진입로


그곳에는 아직도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얼어붙은 눈길을 뽀드득 뽀드득 발소리 내며 묘역으로 오르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봄을 찾아 나선 게 아니라 이건 다시 겨울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눈길을 밟으며 호젓이 산길을 오르는 기분이 겨울에도 누리지 못했던 낭만과 정취를 뒤늦게 누려보는 듯하다.



솔향기 가득한 진입로
솔가리가 수북한 우거진 숲길은 솔향기 가득하다. 편편한 돌계단이 솔가리에 묻혔다가 다시 나타났다 하며 길을 잇는다. 운치 있고 아름다운 길이다. 주차장에서 묘역까지 이어지는 250m 거리의 진입로가 그래서 짧게만 느껴진다.



양지 바른 묘역에도 눈이 하얗다. 군데군데 눈이 녹아 설핏설핏 잔디를 드러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눈이 가득한 묘소는 생각보다 소박하고 조촐하다. 역사에 기록된 서희 선생의 업적을 떠올린다면 호화롭고 위용 넘치는 모습을 갖추고 있을 법한데도.

소박한 묘역


"서희 장군 묘역"이라고 표시된 이곳 팻말에서도 그렇거니와, 여러 곳의 기록과 자료에 나오는 "서희 장군"이라는 호칭은 사실 애매한 점이 있다. 서희는 고려 광종 11년(960)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친 문신이다. 거란의 80만 대군과 직접 싸우지 않고 대화로 물러가게 했으니 외교가인 셈이다.



고려 때 묘제의 특징을 보여준다
고려의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고려 성종 12년(993)에 소손녕을 총수로 한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다. 적은 북쪽 경계의 봉산군을 격파하고 계속 남쪽을 위협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화해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했다. 이에 서희는 단신으로 적진으로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유혈의 전투 없이 적의 80만 대군을 물러가게 했다. 이때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을 반박하며,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임을 설득하여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점거한 280리 강동 6주 땅, 즉 지금의 평북 일대를 보존하는 위대한 공을 세웠다.



서희 선생의 묘는 부인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는데, 봉분은 돌로 2단 호석을 두른 직사각형의 봉분이다. 쌍분 중앙의 앞쪽으로 묘비 1기와 2기의 상석이 있다. 그 앞에 장명등(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석등)과, 좌우에 묘를 지키기 위하여 세우는 문인석 무인석 1쌍씩 놓여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천 년 세월에 석상도 닳고...


천년 넘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 무덤을 지키는 석상들은 비바람에 닳고 닳아 이제는 형체도 어렴풋하다. 돌도 닳게 하는 그 긴 세월 동안 서희 선생의 무덤이 이렇게 오롯이 남은 것은 후손들의 노력이리라. 197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서희장군 묘역은 이천 서씨 대종회가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 등록 당시만 해도 묘 좌우에 1기씩 있던 장명등이 지금은 1기만 남아 있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천 년 세월에도 제자리를 지켜왔던 그것을 어느 인간의 욕심이 뽑아간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 기만 남은 장명등
*맛집

여주쌀밥과 민물매운탕, 막국수가 여주의 별미다. 여주군청 뒤에 여주선을 비롯한 강변도로에 많은 매운탕집이 있고 신륵사 관광지내와 흥천면, 금사면, 강천면 등 남한강 주변에 매운탕집을 겸한 횟집이 산재해 있다. 매년 가을이면 막국수축제가 열릴 만큼 유명한 천서리막국수를 먹으려면 대신면 천서리 막국수촌으로 가야 한다. 서희 묘역 오가는 길 주변에도 보리밥집과 쌈밥집 등 깔끔한 음식점이 여럿 있다.



묘역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
*가는 요령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나들목에서 빠진다. 곤지암 사거리에서 양평 방면의 98번 도로를 따라 산북면으로 향한다. 산북파출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365번 지방도를 타고 상품초등학교를 지나서 서희장군 묘역을 알리는 푯말이 보인다. 푯말을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재실과 신도비가 있는 주차장이 보인다.



이준애 (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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