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보다 붉고 향기로운 순교의 땅

입력 2010년06월11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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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스쳐 지나치기만 했던 곳이다. "죽산성지"를 알리는 큰 바윗돌 표지석을 보며 그곳보다 더 관심이 갔던 것은 표지석 옆을 멋지게 장식한 나무조경이었다. 두루미인지 학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표지석을 가운데 두고 풀쩍풀쩍 뛰노는 듯한 그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성지를 알리는 표지석 옆으로 새 모양의 나무 조경이 눈길을 끈다.


안성 죽주산성을 다녀오는 길에 이번엔 그 표지석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미뤄뒀던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는데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더없이 이국적이다. 드넓은 평원. 사이프러스 숲만 우거졌다면 영락없이 저 이탈리아 토스카나 평원 어디쯤이라 해도 곧이들을 만한 풍경이었다(이 착각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는 성지순례를 마치고서야 알게 됐지만 말이다).



성전 입구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에 자리한 죽산순교성지는 38번 국도에서 진입로를 따라 얼마 들어가지 않아 모습을 보인다. 지금은 사람이나 차들의 출입이 수월한 곳이지만 예전엔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뜸한 후미진 골짜기였다고 한다.



죽산성지의 첫인상은 성지를 둘러싼 옛스런 담장이며 기왓장을 올린 성전 입구 때문인지 여느 성지완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은 성전 입구를 들어서면 더욱 확실해진다. 나무와 꽃과 조각이 어우러진 성지 안은 마치 아름다운 테마공원에 들어선 듯하다. 어디를 봐도 정성껏 가꾼 조경작품들이 멋진 풍경을 그려낸다. 알고 보니 빼어난 이 조경작품들은 모두 이곳 본당신부님들의 솜씨라고. 조경사 자격증까지 갖춘 신부님들이 손수 꾸민 작품들로 이렇듯 아름답게 성지를 가꾸고 있었다. 그제서야 표지석 옆에 뛰놀던 새의 생동감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성당


특히 6월에 이곳은 장미의 화원으로 변한다. 대성당 앞, 장미가 만발한 로사리오 정원에는 장미숲과 장미터널이 황홀하게 연출된다. 예수님의 고행을 기록한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거닐 때도, 담장을 따라 걷는 묵주길에도 은은한 꽃향기가 그치질 않는다.



십자가의 길
이렇듯 아름답고 향기롭게 가꿔진 곳이지만 이곳은 더할 수 없는 아픔과 처참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천주교의 4대 박해 가운데 하나인 병인박해(1866년)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치명일기> <증언록> 같은 옛 책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5명이나 되고, 더 많은 이름없는 순교자들이 처참한 고문을 받고 피 흘리며 이곳에서 순교했다.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고,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 날 한 시에 순교한 이도 있었다. 당시 국법에는 부자(父子)를 한날한시 한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처형했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이진(夷陳)터"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인데,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그리 불렀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해서 "잊은 터"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순교자들의 묘역


죽산에는 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6km쯤 떨어진 삼죽면 소재지로 지금은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이 주막거리는 용인·안성·원삼 등지에 사는 천주교인들이 포졸에게 잡혀 가는 호송길에 잠시 쉬어 갔던 곳이라 한다. 포졸들은 줄줄이 묶은 천주교인들을 마구 두들겨 패곤 했는데 두들겨 맞는 곳이라는 뜻으로 "두들기"라 했던 것.



높게 솟은 현양탑
성지 초입에서 토스카나 평원쯤으로 착각했던 아름다운 평원은 순교자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처형된 이진터 자리였다. 참혹했던 그 역사는 굴착기에 밀려 사라지고 지금은 일대가 목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들이 피흘려 순교한 자리엔 장미보다 아름다운 숭고한 정신이 꽃피고 있다.



*맛집

무명순교자묘
죽주산성편 참조.



*가는 길

옛 관아 모습을 한 담장
중부 고속도로 일죽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안성, 죽산 쪽으로 우회전한다. 성원 목장 입구에서 표지석을 따라 좌회전해 들어가면 곧 죽산성지다. 진입로 길목 좌측으로 넓은 밭이 이진터다. 영동고속도로에서는 양지 나들목에서 나와 17번 국도를 타고 죽산리로 향한다.

공사 중인 영성관
잊은 터"는 지금 목장으로 변신 중
"다 내게로 오라"고 말하는 듯한 예수님상


이준애 (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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