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의 기함 페이톤이 진화했다. 베이징에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던 페이톤을 봤을 때 이미 들었던 느낌이다. 그 페이톤을 중국 하이난에서 다시 만났다. 하이난의 시내와 고속도로를 직접 운전해 달리는 동안 그 첫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국내에 출시되지 않는 3.6ℓ엔진을 얹은 차였지만, 국내 소비자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스타일
가장 큰 변화는 신형 투아렉과 패밀리 룩을 이루는 전면부다. 새로운 라디에이터 그릴이 온순했던 기존 모델과 달리 강인함을 내뿜는다. 비로소 폭스바겐의 기함이 갖춰야 할 얼굴로 바뀌었다는 느낌이다. 역동적이라는 평가도 어울린다. 그만큼 전체적으로 직선을 강조했다.
라디에이터 그릴의 강렬한 크롬 라인은 최근 세계 자동차 시장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중국 취향"을 담아냈다. 페이톤의 기술을 담당한 로버트 슈미트는 "중국이 아닌 세계 각 시장의 요구를 반영했다"고 설명했지만, 중국인들이 번쩍번쩍한 크롬 장식을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물론 국내 소비자들도 좋아하는 취향이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페이톤의 전면부에는 좋은 반응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릴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들어간 폭스바겐의 로고에는 전방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센서가 들어갔다. 범퍼도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으로 새롭게 제작했다.
헤드라이트는 바이제논을 썼다. 방향지시등과 조향에 따라 조사각이 바뀌는 어댑티브 라이트 기능도 적용했다. 또한 60km/h가 넘는 속도에서 작동하는 다이내믹 라이트 어시스트가 들어갔다. 이 기능은 도로에서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센서로 감지해 그 차가 위험하지 않을 만한 조도로 조정한다.
후면부는 전작이 펑퍼짐한 엉덩이로 육중함을 드러냈다면 신형은 안쪽으로 좁아지면서 날렵한 라인을 뽐낸다. 리어 램프는 영문자 "M"자를 LED로 박아넣었다. 시인성을 확보하면서 페이톤의 존재감을 드러낼 만한 디자인이다.
실내는 동급의 어떤 차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호화롭다. 가죽 시트와 우드 패널, 크롬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시승차의 시트 색상은 베이지와 갈색을 준비했는데, 국내에서는 갈색 시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폭스바겐코리아 박동훈 사장이 전했다. 수제작 차의 장점은 모든 옵션을 소비자가 직접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인데 아직 이런 문화가 정착되기 위해선 선결해야 할 게 많은 국내 사정이 조금 아쉽다.
구글맵과 연동하는 새로운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자동차 내비게이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페이톤에서 구글맵을 쓰게 된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다. 방대한 지도 정보를 가장 적은 용량으로 모두 표현해주는 맵은 구글밖에 없기 때문. 또한 세계 어느 곳에서나 호환이 가능한 점도 큰 장점이다. 그러나 한국형 지도는 들어가지 않는다. 이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위성과 연계해 최적의 주행 경로를 운전자에게 알려주고 도로의 표지판을 분석해 운전자에게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해 주기도 한다. 30기가바이트짜리 하드드라이브를 채택해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과 넉넉하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블루투스를 이용한 핸즈프리도 갖췄다.
▲성능
신형 페이톤은 V6 3.6ℓ, V8 4.2ℓ, W12 6.0ℓ를 얹은 가솔린 세 종류와 3.0ℓ TDI를 올린 디젤 한 종류로 구성된다. 국내에는 디젤인 3.0ℓTDI와 가솔린인 V8 4.2ℓ가 들어온다. 시승차는 V6 3.6ℓ엔진을 준비했다.
시승차에 올라간 V6 3.6ℓ엔진은 국내에 시판 중인 CC의 엔진과 같다. 최고출력 280마력, 최대토크는 37.74kg·m이다. 특이한 점은 각 실린더가 마주보는 일반적인 V자형 엔진이 아니라 각 실린더가 엇갈려있는 VR6라는 점이다.
트랜스미션은 6단 자동변속기를 올렸다. 현재 거의 유행처럼 알려진 고단변속기를 쓰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이미 신형 투아렉에는 8단 변속기를 쓰고 있어 그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폭스바겐은 변속기 크기를 고려해 6단을 넣었다고 설명한다. 페이톤의 엔진룸에 장착하기엔 8단이 너무 컸다는 것. 그래서 이번 페이톤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며, 차세대에나 들어갈 것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지금 모델은 6단으로도 충분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가속 페달을 서서히 밟았다. CC와 같은 엔진을 쓰고 있지만, CC처럼 차가 튀어 나가지는 않는다. 차 무게 때문인 듯싶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좀 더 육중한 느낌이 강하다. 가속은 3.0ℓ TDI를 얹은 페이톤보다 토크가 낮아 더디게 느껴진다. 그러나 국내 출시 모델은 3.0ℓTDI, V8 4.2ℓ로 국내에서는 비슷한 문제점은 지적되지 않을 것이다.
페이톤이라는 차의 성격이 폭발적인 운동성능보다는 안락함에 맞춰져 있다는 점을 떠올려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속력보다는 안정적인 주행이 더 중요하다. 어쨌거나 100km/h를 넘나드는 속도에서는 이런 스트레스도 거의 모두 사라져, 폭스바겐 특유의 주행성이 살아난다. 그러나 중국 도로 사정 때문에 더 속력을 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길에 소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역주행하는 오토바이를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스펜션은 부드러운 편이다. 기존에 견주면 "이거 폭스바겐 맞나?" 싶은 의문이 들 만큼 큰 변화다. 여기서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고객의 취향을 다시 한 번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역 운전자들이 대형세단의 덕목으로 꼽는 것이 바로 승차감이기 때문이다. 페이톤이 이 지역에서 판매가 높은 만큼 소비자들의 입맛을 웬만큼 맞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딘 것 같던 가속도 납득이 간다. 페이톤도 세계 시장에서 통할 럭셔리 세단의 정형을 갖춰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기어 레버 아래로는 차 높이와 주행 모드를 조절하는 스위치가 있다. 차 높이는 3단계로 변화하고 주행 모드는 4단계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전반적으로 부드러워진 승차감은 부인할 수 없다. 도로 굴곡이나 과속 방지턱을 넘는 느낌도 예전보다 울렁거림이 잦아들었다.
부드러운 주행능력과 승차감에 비해 코너링은 페이톤답다. 전작에서도 그 육중한 몸으로 코너를 예리하게 빠져나갔던 기억이 난다. 신형도 그에 못지않다. 달리기 능력만큼이나 잘 돌아야 한다는 자동차 본연의 가치를 잘 녹여냈다는 평가다. 폭스바겐의 4륜구동 시스템인 "4모션" 덕분이다.
일반적인 크루즈 컨트롤 시스템의 발전형인 ACC(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는 차간거리를 조절해 안전운전을 돕는다. 앞 차와 거리를 설정해 놓고 크루즈 컨트롤로 일정 속도를 설정해 놓으면, 간격을 감지해 진행 상황에 따라 차의 속력을 줄이면서 완전하게 차를 정지시킨다. 30km/h부터 작동시킬 수 있으며 고속도로든 일반 도로든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싶다.
▲총평
지난 4월 말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던 "2010 오토차이나"에서 폭스바겐 R&D 수장 울리히 하켄베르그 박사는 "신형 페이톤은 디자인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더욱 완벽하게 완성됐다"고 말했다. 이번 페이톤 시승에서 느낀 점이라면 그 호언장담이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것이다. 폭스바겐코리아의 박동훈 사장도 "국내 출시가 유력한 9월부터 올해 말까지 300대 이상을 팔 것"이라고 자신했다. 페이톤이 좀 더 대중에게 다가서기 좋은 쪽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페이톤은 새로운 세대에 들어서 완벽하게 진화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고, 웅장하면서도 날렵해졌기 때문이다. 국내 소비자에게 이 변화가 어떻게 비춰질지 아직은 두고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먹힐 것이라는 생각이다. 가격은 기존보다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럭셔리 세단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는 페이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지 못할 것 같다.
하이난(중국)=박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