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모터스포츠 경주 가운데 최대 규모로 꼽히는 CJ슈퍼레이스 1전과 2전이 오는 7월3일과 4일, 일본 오토폴리스 서킷에서 열린다. 이에 따라 CJ슈퍼레이스는 국내 관람객 한 명 없는 "그들만의 리그"로 경기를 시작하게 됐다. 그동안 모터스포츠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 왔던 모터스포츠 업계도 CJ의 일본 경기 강행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CJ가 경기 개막 장소를 일본으로 정한 데는 경주장과 빚은 마찰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자동차 경주장으로 쓰는 태백서킷이 경주장 이용료를 대폭 올리자 이를 거부하면서 일본을 선택한 것. 비싸게 받으려는 경주장과 비용을 아끼려는 주최측이 충돌하면서 개막전을 일본에서 개최하는 사상 초유의 "황당한" 결과가 나온 것.
▲시작은 "돈 문제" 갈등 확대는 "자존심 문제"
양쪽의 갈등은 지난 시즌이 끝난 뒤부터 불거졌다. 2009 시즌이 끝나자 태백 레이싱파크는 경주장 하루 이용료를 5,000만 원으로 인상한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보다 두 배나 오른 것으로, 대회를 주최하는 프로모터로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국내에서 자동차경주장은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와 태백 레이싱파크 두 곳이 있지만 에버랜드 스피드웨이가 보수공사를 이유로 사실상 문을 닫아 태백 레이싱파크가 유일한 경주장이다. 게다가 태백 레이싱파크는 국제 경주 규격에 적합한 시설을 갖춘 "제대로 된" 서킷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모터스포츠의 메카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경주장 독점 시대가 열리자 태백 레이싱파크는 이용료를 전격 인상하기에 이르렀다. "국내 유일의 서킷"이라는 점을 악용한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와 관련, 경주를 개최하는 프로모터는 "레이싱파크가 인상된 가격을 강요해 국내에서 대회를 개최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통상 주말에 경주가 2회씩 개최된다는 점에서 1년 단위로 계산하면 추가 지출을 몇억 원이나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프로모터들은 "태백에서 더 이상 경기를 열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태백 레이싱파크는 비난이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것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용료와 관련해 프로모터들이 협상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다. 게다가 태백 레이싱파크는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와 마찬가지로 사유지라는 점을 강조했다.
레이싱파크 관계자는 "경영 악화로 가격 인상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며 "기존 구조로는 수익을 도저히 낼 수 없어 인상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프로모터와 서킷의 "파워 게임"
업계에선 이번 사태를 경주장과 프로모터의 파워게임으로 보고 있다. 양쪽이 대화보다 개별 행동에 나서면서 갈등의 골도 깊어진 상황이다.
태백 레이싱파크는 "언제나 우리 서킷은 열려 있다"며 "프로모터와 진지한 논의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프로모터들은 "태백에 더 이상 갈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제 갈등은 단순한 "돈 문제"를 넘어 "힘겨루기"로 번졌다는 의미다.
하지만 한쪽에선 프로모터들의 행태도 비판하고 있다. 국내 모터스포츠 발전을 위해 함께 힘써야 하는 프로모터가 자신들의 입장만 내세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이어지면 그나마 소수에 불과한 모터스포츠 관람객이 경주를 직접 볼 기회마저 없어져 대중화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상황은 "독자노선"
CJ 슈퍼레이스 일본 개막전과 관련해 KGTCR 관계자는 "일본 경기는 올해 초 발표했고, 지난해부터 기획해왔던 것"이라며 "태백과 관계 없이 개최하려 했으나 개막전을 치루게 돼 모양새가 좋지 않을 뿐"이라 전했다. 하지만 CJ 슈퍼레이스는 총 6전을 치르는데 이 가운데 두 번의 경기만 일본에서 열리게 돼 나머지 경기 개최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KGTCR관계자는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도 대회를 개최하며 아시아 투어도 고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내 최고 자동차경주가 해외에서 계속 열린다면 국내 모터스포츠는 뒷걸음질할 수밖에 없다.
국내에선 태백 서킷이 현재 유일한 방법이지만 프로모터로서는 태백에서 경기를 치를 명분이 없게 돼 올해 안에 경주가 태백에서 열리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또한 대안으로 떠오른 전남 영암 F1 서킷은 F1 GP가 끝나는 10월 말 이후에나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우선 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니며 대회를 열 전망이다. 이에 따라 한 명이라도 더 관람객을 끌어 들여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관람객을 외면하는 처사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태백 레이싱파크는 자체적으로 대회를 개최,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현재 MMF와 SCC 두 대회를 열며 참가자도 늘어나고 있다. 프로모터와 벌인 싸움 초기에는 선수들이 참가를 꺼렸지만 현재 SCC에 70대가 넘는 차가 경주에 참가, 규모 면에서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레이싱파크 관계자는 "자체적인 대회 한두 개를 개최하며 자생력을 키우고자 한다"며 "CCTV를 설치해 인터넷으로도 생생하게 서킷을 살필 수 있게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양쪽의 독자노선, 문제는 없나
CJ 슈퍼레이스, 넥센 RV 챔피언십, DDGT, 스피드 페스티벌 등 지난해까지 활발하게 열렸던 대회들이 올해는 감감무소식이다. 태백 레이싱파크에서 자체적인 대회가 열리지만 선수들이 프로모터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탓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스폰서를 등에 업은 프로모터들은 태백 경주장 이용료가 올랐다 해도 큰 타격이 없다"며 "그러나 프로모터들이 약속이나 한 듯 경주장을 외면하는 것은 일종의 담합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익을 추구하는 프로모터들이 세를 규합해 태백 쪽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해외 경기도 좋지만 한국인이, 한국 관람객을 위해, 한국에서 경기를 치러야 하는 게 당연하다"며 "그게 바로 모터스포츠 발전을 위한 대승적 행위"라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프로모터가 눈 앞의 이익에 못 이겨 해외로 나가는 것은 외화 낭비라는 점만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태백 레이싱파크도 허점을 드러냈다. 지난 주말 개최된 경주에선 경주 전 검차를 소홀히 한 데다 검차 중에 오피셜 브리핑을 하는 등 매끄럽지 못한 진행을 보여 참가자들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한 참가자는 규정을 어긴 것으로 보이는 경주차를 타고 서킷을 질주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레이싱파크 관계자는 대회에 앞서 "경주협회에서 대회 일정에 맞춰 오피셜 교육일정을 변경하는 등 협조가 없어 조금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반적인 진행에서 프로답지 못했다는 게 참가자들의 지적이다. 한 참가자는 "즐겁게 달리는 기억이 아니라 좋지 않은 기억으로만 남게 돼 아쉽다"며 "규정 어긴 차에 아무런 조치가 없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그동안 경주장 제공에 주력했을 뿐 직접 경기를 치러 본 경험이 없어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노력 없이 결과만 바라는 꼴
가격 인상이든 대회 참가 거부든 문제는 "돈"이다. 업계에선 프로모터들이 그동안 스폰서에만 지나치게 의존했고, 경주장은 경기 외에 일반인도 찾아 즐길 수 있는 마케팅에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본질적 문제 해결은 외면한 채 겉모습 치장에만 신경 썼고, 그것이 결국 지금의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프로모터나 서킷이 힘을 합쳐 제대로 된 드라이빙 스쿨을 개최한 적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몇몇 이벤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안으로 연예인 카레이서를 앞세우는 것도 좋지만 차를 즐기고 차와 함께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데에는 게을렀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선 모터스포츠 업계의 갈등은 하루 빨리 봉합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더불어 열악한 국내 모터스포츠 대중화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일이 급하다고 충고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10년 전 모터스포츠와 지금의 모터스포츠가 하나도 다르지 않을 만큼 폐쇄적"이라며 "지금은 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 모터스포츠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 마련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돈 문제 때문에 스스로 대중화의 길을 포기하는 이기심이 오히려 모터스포츠 발전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란 지적도 덧붙였다.
박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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