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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한 정자 |
병풍처럼 우뚝 솟은 암반 위에 솔그늘 드리운 정자 한 채가 고고히 자리잡았다. 낮은 야산을 뒤로 두고, 절벽 아래로 연꽃 가득한 연못이 펼쳐진다. 툭 터진 누마루에 서면 시원한 솔바람이 몰려와 땀을 씻어간다. 누가 무릉도원이 멀리 있다 했던가, 산중 정취 느끼며 무더위 쫓는 이 곳이 무릉도원이리라.
보기만 해도 시원한 이 풍경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에 자리한 병암정의 여름 정취다. 고을마다 물맑고 경치좋은 곳에 자리한 정자는 4계절 언제 찾아도 좋지만 여름철만큼 제멋을 느끼기에 좋은 때도 없다. 여느 피서지와 달리 멋과 풍류를 누리면서 더위까지 피할 수 있으니 1석2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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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바깥에서 본 정자 |
병암정은 널리 알려진 정자는 아니다. 내로라하는 역사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게 매겨진 여러 정자들에 비해 크게 내세울 것도 없다. 하지만 정자의 경관을 놓고 따진다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빼어나다. 그래서 역사 드라마의 주요 무대로 이용되기도 했다.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황진이>의 무대가 바로 이 곳이었다. 황진이(하지원 분)가 첫사랑인 김은호(장근석 분)를 만나는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다. 국화가 뿌려진 다리를 건너던 장면, 반지를 끼워주며 "오즉여, 여즉오(吾則汝, 汝則吾)"의 사랑을 고백하던 장면 등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꼽혔던 씬들이 병암정을 무대로 했다.
촬영 당시 만들었던 연못 속 정자와 구름다리 등의 세트는 모두 철거했고, 지금은 주변을 공원처럼 말끔하게 단장해 놓았다. 연못 둘레로 벤치와 산책로를 구성했고, 정자로 올라가는 길도 잘 다져 놓았다. 벼랑 위 큰 바위 위에 자리한 정자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어 밖에서 바라볼 땐 좀 답답한 감이 있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탁 트인 시야가 일품이다. 정자 누마루에 서면 넓은 들판과 나지막한 마을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소백산맥 줄기가 멀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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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말해주는 나무줄기 |
병암정은 일제강점기에 예천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권원하 선생과 관련있는 건물이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한 뒤 군정서의 밀명을 띠고 입국해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예천에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며 구국운동을 펼쳤던 선생은 일경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한 뒤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1936년 세상을 떠났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병암정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고종 광무 2년(1898)에 법무대신 이유인이 근처 금당마을로 낙향해 아흔아홉 칸 저택과 함께 옥소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1920년 무렵 예천 권씨 문중에서 옥소정을 매입해 이름을 병암정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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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연못과 절벽 위 정자 |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자 건물은 마루와 온돌시설을 갖추고 있다. 19세기 후반 건물양식을 보여주는 구조로, 정자가 자리한 위치 또한 정자 건축의 기능에 적합한 입지 조건을 구비했다. 바위, 연못, 석가산(정원 따위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 등의 전통 조경 요소는 당시 조경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정자 오른쪽에 위치한 별묘는 원래 인산서원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되자 사당만 이 곳으로 이건해 권씨 문중을 봉사하는 별묘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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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속 이 섬에 드라마 촬영세트가 있었다_ |
*맛집
예천읍 동본리 참우촌(054-655-4288)은 질좋은 예천 참우를 실속있게 선보인다. 특수 고급 부위를 모은 모듬육을 비롯해 육회, 육회비빔밥 등을 맛볼 수 있다. 용궁면 읍부리(용궁역 부근)로 가면 박달순대, 흥부네토종한방순대 등 소문난 순대음식점이 이어진다. 병암정과 가까운 거리의 금당실마을에는 두부요리 전문점 안동식당(054-655-8752)과 오리고기전문점 궁중(054-655-0696)도 있다.
*찾아가는 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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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누마루에 서면 너른 들판과 마을이 보인다 |
중앙고속도로 예천 나들목에서 나와 928번 지방도를 타고 예천읍내로 들어간다. 28번 국도를 이용해 가다가 용문 방향 928번 지방도로 옮겨 탄다. 금당마을 못미처 왼쪽으로 병암정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논둑길을 들어가면 병암정 주차장에 이른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