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고판화박물관
곡식 추수하듯 햇살도 추수할 수 있다면 쓸어모아 담아두고 싶을 만큼 청명한 가을날이다. 그 햇살 속으로 떠나는 가을여로는 눈부시고 황홀하다.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치악산 동남쪽 자락, 솔향기 들꽃향기 산새소리 어우러진 가을산 한복판으로 그윽하게 번지는 묵향의 여운이 발길을 잡는다. 고판화박물관이 바로 그 곳. 도로를 벗어나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나지막한 건물 서너 채가 머리를 맞댄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단층의 박물관 건물 옆으로 너와지붕 법당과 불상, 탑 등을 거느린 작은 절집 명주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2004년 문을 연 고판화박물관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티벳, 몽골, 인도, 네팔 등 판화가 발전했던 동양 여러 나라의 고판화 자료들을 수집, 보관하고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다. 절집과 나란히 있는 것에서 짐작하듯 이 박물관은 명주사의 주지인 한선학 스님의 노력으로 일궈낸 소중한 결실이다.
그가 국방부 법당 주지로 있던 1996년 중국 항저우에 들렀다가 기념품으로 샀던 목판각이 감정결과 가짜로 밝혀진 적이 있다. 그 때의 황당함과 속상했던 경험은 "목판각에 대해 제대로 한번 공부해보자"는 오기를 불러왔고, 그 결과가 오늘의 고판화박물관을 있게 했다. 한 점 두 점 모으기 시작한 자료들은 현재 목판원판 1,800여점과, 판화로 인출된 고판화작품 300여점, 목판으로 인출된 서책 200여점과 판화와 관련된 자료 200여점 등 총 3, 500여점의 유물에 이른다.
전시된 유물을 보면 고려와 조선시대는 물론 중세 중국, 중세 인도의 목판각들과 19세기 프랑스 인상파에 영향을 끼쳤다는 일본 명치시대의 채색판화까지 망라돼 있다. 그 중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성학십도 목판각과 궁중에서 사용했던 임금의 메뉴판격인 진찬의계 목판각, 중국의 오대산 전경과 법회 장면을 담은 ‘오대산성경전도’ 목판각 등 자료적 가치가 큰 유물들이 많다. 오대산성경전도는 산, 계곡, 거리가 약도처럼 그려져 있는 데다 300명도 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당시의 복식과 풍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눈여겨봐야 할 자료 중에는 철종 때 간행된 오륜행실도 판화가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판목상자다. 삼강행실도류 판화는 세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조선시대 내내 간행된 것으로 효자, 충신, 열녀 등 유교적 덕목으로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국가가 발간한 국민윤리 교과서에 해당한다.
풍속화가 김홍도의 그림에, 한글서체의 완성본이라 할 만큼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서체(그래서 "오륜체"라고도 명명)를 자랑하는 오륜행실도는 그 동안 서책으로는 여러 종류가 남아 있었으나 목판 원판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충격적인 모습으로 발견됐다.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난방용 나무화로(이로리)의 바깥을 장식하는 나무판재로 오륜행실도 목판이 사용된 것. 이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어떻게 파괴하고 수탈했는 지 생생히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 밖에 각 나라별로 다양한 내용의 원판과 판화를 전시했고 한지를 겹겹이 붙여 쪽물을 들인 후 책의 표지로 사용한 능화판, 매·호랑이 등을 새긴 호신용 부적판화도 눈에 띈다. 전시장 옆에는 판화와 불교 관련서적을 비치해 관람객들에게 ‘판화’와 ‘불교문화’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고판화박물관은 치악산 명주사와 함께 있어 뮤지엄스테이와 템플스테이를 동시에 할 수 있다. 박물관 관람과 명상, 다도, 참선 예불 등 산사체험을 겸할 수 있는 것. 다양한 판화를 직접 찍어보는 판각 인출작업도 체험할 수 있다. (고판화박물관 033-761-7885. www.gopanhwa.or.kr)
*맛집 황둔리로 가면 마을 전체가 찐빵 상호 입간판으로 가득한 찐빵마을이 나온다. 황둔찐빵은 유명한 안흥찐빵보다 더 원조마을이라고 자부한다. 황둔찐빵의 특징은 자연에서 얻은 웰빙 재료를 사용한 영양 넘치는 맛이다.
*찾아가는 요령 중앙고속도 신림 IC에서 나와 주천 방향으로 향한다. 신림터널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으로 고판화박물관 진입로 입간판이 서있다. 200m쯤 들어가면 박물관과 명주사가 보인다. 진입로에서 큰 길을 따라 황둔리로 향하면 유명한 황둔찐빵마을이 나온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