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애절한 사랑 잠든 '정릉'

입력 2012년01월19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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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정릉


 설 연휴가 이어지는 이번 주말은 나들이 인파보다 고향을 찾는 귀성차로 전국의 고속도로와 국도가 몸살을 앓을 듯하다. 때문에 서울에서 명절을 보내는 이들도 이 기간동안 어디로 떠날 엄두를 쉬 내지 못한다. 자칫하다간 나들이는 고사하고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낼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서울시내 명소들로 눈길을 돌려보자. 설날을 맞아 다양한 볼거리와 행사가 열리는 고궁나들이도 좋고, 한옥마을 등지에선 다채로운 체험행사가 열려 설 기분을 더욱 흥겹게 만든다. 떠들썩한 분위기와 인파를 피하고 싶다면 고요하고 호젓한 조선 왕릉 나들이는 어떨까.
 

 조선 왕릉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래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519년동안 이어진 조선왕조의 총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전체 42기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 처럼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 건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까닭에 지난 2006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서울시내에 있는 왕릉은 정릉(貞陵)을 비롯해 헌인릉, 선정릉, 태강릉, 의릉 등이다. 그 중 서울 성북구에 있는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으로,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제는 옛말이 됐지만 산동네로 유명했던 길음동 "아리랑고개"를 넘어 아리랑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아파트단지 사이로 난 좁은 길이 이어진다. 이렇게 주택가와 가까운 곳에 과연 왕릉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무렵 정릉을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매표소가 나온다.   


 표를 끊고 정릉 안으로 들어서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빡빡한 건물들과 분주한 자동차 행렬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고요한 정적과 맑은 공기, 얼어붙어 빙벽을 이룬 계곡과 숲이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선 듯하다. 그 호젓한 분위기가 망설임없이 까마득한 저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고려 권문세가의 딸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鄕妻)와 서울에서 얻은 새 부인인 경처(京妻)를 두는 게 풍습이었는데,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였다. 향처인 한씨 부인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됐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고 1396년(태조 5년) 병환으로 세상을 뜬다.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해 능호를 정릉으로 정했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후에는 그녀의 소생 중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원망을 품은 방원을 비롯한 전처 소생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방원(태종)은 계모인 신덕왕후의 능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406년(태종 6) 정릉의 능역이 도성 안에 위치하는 건 옳지 못하며, 능역 또한 너무 넓다는 논란이 있자 태종은 정릉 100보 밖까지를 주택으로 허가했다. 따라서 하륜 등 당대 세도가들이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저택을 짓게 됐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애써 조성한 사랑하는 아내의 능이 초토화되는 걸 보고 남몰래 눈물지었다고 한다.


 1409년(태종 9년)에는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전하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태종이 이를 허락해 지금의 정릉 위치인 도성 밖 양주땅 사을한록으로 천장했다. 태종은 이 때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아버리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했다. 1410년(태종 10년) 여름에는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인해 무너지자 예전 정릉의 석물이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들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했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왕비의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밟고 다니게 됐다.


 태종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종과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만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의 신위는 모시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로써 태조가 사랑했던 신덕왕후는 죽은 후에도 새어머니를 미워한 아들에 의해 한참을 푸대접 받다가, 그로부터 260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다시 정릉의 상설을 복구하고 종묘에 배향을 결정하게 됐다.

 *맛집
 정릉 입구 2층짜리 가정집을 개조한 봉화묵집(02-918-1688)은 경북 봉화 출신의 할머니가 40여년째 하고 있는 맛집. 봉화에서 농사지은 메밀을 구입해 직접 묵을 쑨다.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변함없어 단골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성신여대 부근 농월정(02-929-7076)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고깃집. 묵은지 삼겹살로 유명하다.

 *찾아가는 요령
 내부순환로 정릉(국민대)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정릉길을 타고 가다가 아리랑고개로 꺾어진다. 조금 가다가 정릉 이정표가 보이는 곳에서 우회전해 아리랑시장을 통과,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정릉 매표소가 보인다. 지하철은 4호선 성신여대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온다. 아리랑고개 방향 100m 지점에서 버스를 타고 정릉입구(구아리랑시장)에서 하차해 700m 남짓 올라간다.

 이준애(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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