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반테아이 스레이
"He has gone!"
눈앞이 깜깜했다. 왜 카메라를 그의 손에 넘겼을까.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걸 탓할 때가 아니었다. 내 손으로 순순히 건네준 카메라를 들고 유유히 사라진 그를 찾아야 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독일인 남자는 망연자실 서 있는 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흘깃거렸다.
사건(?)은 반테아이 스레이(Banteay Srei)에서 일어났다. 씨엠립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이곳은 앙코르 유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967년 자야바르만 5세 때 완공된 힌두교 사원으로, 1914년까지 원시림에 묻혀 있다가 프랑스 지리관측 장교에 의해 뒤늦게 발견된 초기 앙코르 유적지이다. 앙코르의 모든 유적이 왕이 지은 사원인데 반해 이곳은 자야바르만 5세의 스승인 야즈나바라하가 지은 개인사원이다.
반테아이 스레이는 "여인의 성채"라는 뜻으로, 사원의 모습을 보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다른 사원과 달리 붉은 사암으로 건축된 건물은 전체가 한 송이 붉은 꽃잎처럼 빛난다. 이 사원 벽면에는 힌두교의 대서사시인 "라마야"와 "마하바라타"를 담은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섬세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벽면의 그 부조는 앙코르 건축예술의 보석으로 비견될 정도다. 특히 북쪽 탑 네 귀퉁이 벽감에 새겨진 꽃을 든 여신상은 "동양의 비너스"라 불릴 만큼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여신상이 또 달리 유명한 것은 1923년 일어난 밀반출 사건 때문인데, <인간의 조건>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는 예술 애호가이면서 동시에 예술품 거래꾼이었다. 당시 그는 이 사원의 유물을 보호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잠입해 사원의 핵심 조각품인 여신상을 도굴하여 밀반출했다. 하지만 프놈펜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어 유적 파괴와 약탈죄로 기소됐다. 그의 아내가 프랑스로 돌아가 남편의 문인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곧 그의 문우들이 구명운동을 펼쳐 말로는 풀려났다. 하지만 그의 도굴행위는 오랫동안 식민지 문화를 약탈한 추문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말로가 탐내었던 이 여신상을 좀 더 가까이서 촬영하고자 버둥거리고 있던 나에게 그가 다가왔다. 제복차림의 그는 엄한 표정으로 나의 행동을 제지하며 캄보디아 말로 뭐라고뭐라고 지껄여댔다. 사원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 쳐 놓은 펜스안쪽으로 넘어갔던 나는 "쏘오리"라고 대답하곤 얼른 펜스 바깥으로 물러나왔다. 그런데 그가 계속 나를 따라오며 뭐라고뭐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으이구 끈질기긴. 그래 내가 잘못했수다, 하며 돌아보는데 그의 표정이 좀 전의 그게 아니다. 어색한 미소까지 띄며 손짓 발짓을 해대는데 종합해 보면 "내가 니 대신 저기 들어가 원하는 걸 찍어줄 테니 카메라를 맡겨라"다.
오잉? 진짜? 하는 내 표정을 읽은 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 땡큐!"를 연발하며 목에 건 카메라를 벗어 그에게 건넸다. 그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니 카메라를 받아들고 펜스를 훌쩍 넘어 사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때마침 햇살이 여신의 풍만한 가슴께로 비춰지며 여신상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숨 막히는 볼륨감을 자랑했다.
제복의 사나이는 바로 그 앞에 서더니 카메라 셔터를 거침없이 눌러댔다. 브라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옆의 독일인이 부러운 듯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들의 반응에 제복의 사나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원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곧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그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He has gone!"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를 어쩐다. 카메라는 차치하고 지금껏 찍은 사진들이 담긴 메모리칩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의 카메라를 맡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지, 목에 건 카메라를 새삼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독일인 남자는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사원 반대쪽에서 내 카메라를 목에 건 제복의 사나이가 씨익 웃으며 모습을 나타냈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이곤 달려와 카메라를 내밀었다. 그가 가리키는 뷰파인더에는 꽃을 든 여신상이 터질 듯한 몸매를 배배 꼬며 나를 향해 농염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복의 사나이가 내 귀에 입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3 dollars please~."
이준애 (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