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바욘사원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의 지혜와 부와 명예를 다 가졌던 솔로몬 왕도 일찍이 그렇게 탄식했지만 앙코르 유적지를 돌다보면 웬만히 무딘 감성의 소유자도 그런 감정에 절로 빠져들게 된다. 타프롬을 비롯해 앙코르톰 유적지는 크메르제국의 마지막 건축물에 해당함에도 이전에 건축된 다른 유적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부서지고 허물어진 모습을 보여 "폐허에 서린 회포"를 감당키 힘들게 한다. 검게 번진 이끼와 돌꽃들, 푸석푸석 내려앉는 석재, 무너지고 파괴된 흔적들에선 지난날 꽃피웠던 화려했던 영화보다는 덧없는 세상사가 먼저 읽혀지기 때문이다.
"거대한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앙코르톰(Angkor Thom)은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걸쳐 만든 도성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앙코르톰의 규모는 앙코르와트보다 "거대하다". 한 변이 3km인 정방형의 도시로, 둘레에 높이 8m의 성벽이 둘러처져 있고, 그 바깥쪽으로 해자가 감싸고 있다. 성벽에는 북대문, 서대문, 남대문과 동북쪽에 "승리의 문", 정동쪽에 "죽은자의 문" 등 다섯 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바욘, 바푸온, 피메아나카스, 코끼리 테라스, 문둥이왕 테라스 등 많은 유적이 기다린다.
그중 앙코르톰 중앙에 위치한 바욘(Bayon)사원은 웅장하고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앙코르와트와 함께 세계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명소이다. 멀리서 보면 헝클어진 거대한 돌무더기처럼 보이지만 가까이다가가면 돌 하나하나를 모두 짜 맞춰 쌓아올린 바욘사원의 정교한 규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사원 안에는 높이 45m의 중앙탑을 비롯해 총 54개의 연꽃봉오리 모양의 크고 작은 불탑이 세워졌는데 그 탑의 4면에는 부처의 얼굴이 모두 새겨져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백 개의 그 부처상이 모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웃을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얼굴, 차가운 미소를 보이는 표정, 더러는 조롱하는 듯한 모습 등 오묘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 부처의 얼굴이 바로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 말한다. 자야바르만 7세는 불교에 귀의한 왕으로 대승불교를 국교로 삼고 이 사원을 건립했는데, "왕권의 신격화"를 꾀한 그는 사면불에 새겨진 부처의 얼굴을 자신의 모습과 닮게 묘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부처의 얼굴이든,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든 그 얼굴 속에 어린 저 불가사의한 미소를 마주하고 시공을 초월한 말없는 대화를 나눌 뿐이다. 햇빛이 드는 각도에 따라 그 얼굴은 시시각각 변하며 오랜 세월 간직해온 숱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바욘사원의 회랑에 새겨진 부조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이곳의 부조는 앙코르와트의 세련되고 우아한 멋에는 미치지 못하나 당시의 생활상을 시시콜콜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이 무척 흥미롭다. 어선을 타고 노를 젓는 사람,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모습에서부터 투계를 하는 사람들, 손금을 보는 점술가가 있는 시장풍경, 꼬챙이에 끼운 생선을 굽는 사람과 돼지를 솥에 넣는 사람들, 쟁반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는 사람 등 시끌벅적한 주방풍경이 금방이라도 되살아날 듯 만하다.
앙코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원나라 때 사람인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로, 그의 기록에 의하면 13세기말 이곳은 국제적인 도시로, 중국 상인과 선원들이 모여 사는 차이나타운도 오래전부터 번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장면들도 부조에 잘 나타나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사람 사는 풍경들, 시공을 초월한 그 풍경들을 뒤로하고 바욘사원을 나설 때면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는 <황성옛터> 노랫가락을 다시 읊조리게 된다.
이준애 (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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