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 홍주성
흐드러지게 피었던 봄꽃들이 하나둘 지고 있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깎이는데(一片花飛減却春) 바람에 나부끼는 만점 꽃잎에 정녕 시름에 잠긴다(風飄萬點正愁人)"고 한 두보의 절창처럼, 창밖 저무는 봄날 풍경이 시름을 깊게 한다.
봄날 애상을 달래줄 여행지는 어디일까. 이름난 명소보다 수많은 봄날을 담담히 지내온 옛 고을의 무심한 풍경 속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한 때 내포지역의 중심지였던 충남 홍성에는 홍주성을 비롯해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멋과 정취가 나붓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 앞뒤에 있는 10개 고을(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을 "내포"라 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홍주목(지금의 홍성)이 관할하는 충남 서천에서 경기도 평택까지의 20여 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내포지역은 충청지역 중에서 서해안을 끼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말까지 줄곧 이들의 행정중심지였던 홍성에는 지금도 읍내 곳곳에 당시의 역사유적이 숨쉬고 있다.
외지사람들이 홍성에 오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게 조양문(朝陽門)이다. 읍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오가며 한두 번은 꼭 보게 된다. 사통팔달의 길을 끼고 있어 주변으로 끊임없이 차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조양문은 홍성읍을 둘러쌌던 홍주성의 동쪽 문이다.
홍주성은 언제 축성됐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 때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이 무렵 축성된 걸로 판단된다. 그 후 여러 차례 개축됐고, 고종 7년(1870)에 크게 확장하고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을 개축하면서 동서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는데,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서문과 북문이 파괴돼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했으나 군민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수성 당시 홍주성은 1,772m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810m만 남아 있다. 당시 성안의 관아 건물만 35동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이 존재한다.
홍주아문은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의 외삼문(外三門)으로, 고종 때인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세웠다. 대원군이 사액한 편액은 6·25를 전후해 망실됐지만,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홍성군청 뒤뜰에 가면 역대 홍주목사가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이 있다. 특이한 점은 지역명에 동헌을 붙였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곳 홍주 동헌만 안회당(安懷堂)이라 한 점이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노자안지, 소자회지"(老者安之, 小者懷之) 구절에서 따온 말로, ‘노인들을 편안히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22칸의 목조 기와 건물로 전란이 잦았던 홍주에서 여러 차례 화를 면하고 지금껏 보존되고 있다.
여하정은 안회당 뒤뜰에 있는 작은 연못에 세워진 정자다. 규모는 작지만 연못 주변으로 멋스럽게 자리한 고목들과 어우러져 제법 은근한 멋을 그려낸다. 홍주 목사들이 공무에 시달릴 때 쉬었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은 근처 사람들이 허물없이 찾아와 편하게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한다. 오랜 세월 그 곳에서 숱한 봄날을 지켜봤을 늙은 나무 그늘에 기대어 이 봄날의 시름을 달래봄은 어떨까.
*맛집
유명한 홍성한우의 제맛을 보여준다는 구항한우 (041-633-0243)는 식당 옆에 한우직판장을 두고 있다. 40여 년 전통의 삼거리갈비(041-632-2681)도 유명하다. 읍내 월계천변에 위치한 이 곳은 여러 매스컴에 소개되기도 했다. 조양문 근처 대동식당(041-632-0277)은 밑반찬이 푸짐하다.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에서 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홍성읍내로 들어간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 벤츠, E300 블루이피션시 판매 돌입▶ 렉서스, 신형 RX350 출시▶ 미쓰비시, "스바루 넘은 뒤 실적 공개하겠다"▶ 수입차, 부산모터쇼 참가 전략은 "실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