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이상재생가
충남 서천군 한산면은 "한산모시"로 유명한 곳이지만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그곳은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의 고향마을이어서 더 감회로운 곳이다. 이상재선생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로 1927년 3월 29일 타계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선생이 태어난 한산면 종지리로 가는 길은 나지막한 건물들이 오밀조밀 머리를 맞댄 정겨운 면소재지를 지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들판을 따라 간다. 별다른 이정표가 없는 들판을 갈 때면 "이거 제대로 찾아가고 있나?" 하는 우려에 자주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런 때 만나는 마을사람들은 더없이 반갑다.
"어르신, 여기 지도에 표시된 이상재생가가 어디쯤인지요?"
지도를 들이밀며 묻는 이방인을 촌로는 찌푸린 얼굴로 아래위 먼저 훑어본다. 심히 못마땅한 표정이다. "왜 이러시지?.....뭐가 잘 못 됐나? "
"월남선생 생가를 가려면......."
아하, 그거였구나. 촌로가 지었던 좀 전의 그 못마땅했던 표정의 이유를 그제사 깨달았다. 마을사람들은 선생의 함자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꼬박꼬박 "월남선생"이라 호칭했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보내고 있었다. 선생이 타계하신 지 10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이 마을사람들에게 선생은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월남선생은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의 혼란스런 시기에 우리 백성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앞장섰던 선각자이자 활동가였다.
일제의 강압에도 물산장려운동과 절제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기여했고 강직한 성품과 신념 그리고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따뜻한 동포애를 통해 당시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길을 밝게 열어주는 등불이 되어 독립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세계열강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 독립협회 활동과 YMCA운동을 통해서 민족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의 진로를 개척하는데 앞장선 우리 민족의 선각자이자 스승이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다.
촌로가 일러준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자 곧 선생의 생가지를 알리는 상세한 이정표와 마을 표지석이 나온다.
종지리 263번지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 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생가는 전면 지붕의 길이가 뒷면보다 길게 만들어졌고,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이 없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가 특징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나고 자라 유아시절부터 청년시절을 보냈다. 15세 때 강릉유씨와 결혼해 신혼을 보냈으며, 18세 때 선생이 집을 떠난 후에도 부인 강릉유씨는 이곳에서 승륜, 승인, 승간, 승준 등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이상재 선생을 뒷바라지했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적 132점, 임명장 6점 등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셨던 총 244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나들목이나 동서천 교차로에서 국도로 내려선다. 광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613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 읍내와 한산애니메이션고교를 지나 종지리 들판이 나온다.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생가지 주차장에 이른다.
이준애(여행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