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기행 ⑤이탈리아 로마
"컴 온, 강남 스타~일"
콜로세움을 떠나려할 때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돌아보니 검투사 복장을 한 미끄덩한 남자 몇이 말춤을 추며 손을 흔든다. 오호, 싸이의 인기가 국제적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다. 로마의 검투사들까지 말춤을 추게 만들다니!
괜히 으쓱해지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환히 웃어 보이는 찰라,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미남자가 닭 벼슬 같은 투구를 벗어 어정쩡히 서 있는 녀석의 머리통에 덥석 씌운다. 그리곤 셔터 누르는 제스추어를 취하며 "Take a picture!"를 외친다. 싸이에게 보태준 거 하나 없는데 이런 환대를 받다니, 싸이씨 땡큡니다! 신나게 셔터를 눌러대는데 유난히 잘생긴 검투사가 다가오더니 손을 벌린다.
"퉤니 유로!"
"What?"
"Twenty euro!"
"......"
얼떨결에 20유로를 털리고 포로 로마노로 걸음을 옮기는데 브이자까지 그려가며 사진을 찍었던 녀석은 못내 속상한 지 툴툴거린다. 앞으로 녀석에게 로마는 ‘말춤 추는 검투사의 상술’로 두고두고 기억되리라.
나에게 로마는 Y특파원으로 기억된다. 당시 근무했던 잡지사의 이태리 특파원이던 Y씨는 이태리 남자 뺨치게 잘 생긴 외모도 외모지만,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태리어며 탁월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현지의 생생한 자동차(특히 디자인 분야) 소식을 매달 전해 주었다.
어느 해 가을, 때마침 열린 토리노 모터쇼 취재와 함께 로마, 피렌체, 나폴리, 소렌토 등지를 소개하기 위해 특별 취재팀이 꾸려져 이탈리아 로마로 날아갔다. Y특파원은 한국말 잘하는 현지인처럼 우리 일행을 이끌고 로마시내 유적지들과 바티칸 시국을, 휘영청 보름달이 뜬 포로 로마노를 누비며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를 칸초네처럼 불러 젖히기도 했다.
로마 뒷골목 선술집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차고 있던 그에게 우리는 “특파원 때려치우고 여행 가이드를 하는 게 어떻겠냐”며 꼬드겼고, 그는 “진지하게 전직을 고려해보겠다”며 맞장구를 쳤지만 유능한 특파원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 우릴 까무러치게 했다. 전설적인 수퍼카로 손꼽히는 람보르기니의 창시자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1916~1993)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었다.
낭보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천진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던 스페인계단에서 전해졌다. 우리 일행도 주변의 수많은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에 둘러싸여 게걸스럽게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는데 어딘가를 급히 다녀온 Y특파원이 흥분한 표정으로 달려 왔다. 혹시나, 하며 의뢰했던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인터뷰가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나!
모든 일정이 뒤로 미뤄지고 그길로 우리는 로마-피렌체의 길목에 자리한 움브리아주로 달렸다. 그곳은 1973년 자동차사업에서 손을 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포도농장을 가꾸며 유유자적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곳이었다. 사진으로 봤던 젊은 시절의 호쾌한 미남자는 작은 키에 낡은 스웨터를 걸친 촌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심지어 양촌리 이장님의 새마을모자 같은 굿이어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그 소박한 모습에 내심 놀랐으나 꿈틀거리는 시커먼 눈썹과 형형한 눈빛은 사진속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람보르기니의 탄생과 그에 얽힌 비화를 한시바삐 듣고 싶어 하는 우리의 껄떡거림은 본 체 만 체하며 그는 자신의 포도밭과 와이너리로, 골프장으로 이끌고 다니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늘어놓기 바빴다.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손주들에게 이것저것 내보이며 자랑도 하고 핀잔도 해대는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마침내 회심의 미소를 띠며 우리를 안내한 곳은 그의 개인 자동차박물관. 1964년 5월 람보르기니사가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350GT를 비롯해 당대 최고의 명차이자 지금까지 최고의 수퍼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우라(Miura)며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던 전설적인 카운타크(Countach) 등 람보르기니에서 생산된 대표 차들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하고 멍 하니 서 있는 일행에게 그는 손수 카운타크의 걸윙도어를 올려주며 운전석에 앉아보라며 권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수퍼카를 만들게 된 계기는 라이벌인 엔초 페라리와의 악연에서 시작되었다. 자동차를 무척 좋아했던 페루치오는 1960년대 초 당시 인기 스포츠카였던 페라리 250GT를 구입했는데 클러치의 결함을 발견했다. 이에 엔초 페라리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면담을 요청했지만 문전박대만 받고 만다. 트랙터를 만드는 주제에 감히 수퍼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이었다.
심한 모욕감을 느꼈던 페루치오는 ‘페라리를 능가하는 슈퍼카를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196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람보르기니’를 세운다. 그리고 “무조건 페라리보다 빨라야한다”는 고집으로 매달린 결과 마침내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는 수퍼카의 전설 "람보르기니"를 탄생시켰다.
인터뷰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그가 직접 생산한 와인으로 건배를 하고 모두들 기분 좋게 취했을 때였다. 일행 중 누군가가 그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숙적이었던 엔초 페라리가 1988년 세상을 떴고, 당신도 자동차에서 손을 뗀 지 오래니 이제 승패를 가릴 일은 없겠다고.
그러자 새마을 모자 같은 굿이어 모자를 쓴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엔초 페라리가 90세까지 살았으니 나는 91세까지 살아 페라리를 이기겠다”고. 그의 이 호방한 답변에 우리는 깨갱 꼬리를 내렸고, 그의 승리를 위해 건배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취재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신을 통해 그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1993년 2월 20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결과적으로 페라리를 이기지 못한 셈이다.
바티칸 시국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는 캄피돌리오광장을 비롯해 미켈란젤로의 모세상과 베드로를 묶었던 쇠사슬이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 콜라 성당, 작은 규모에 비해 알찬 볼거리가 많았던 보르게제미술관 등을 돌아다니며 나는 시종 그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람보르기니와 Y특파원을 추억하고 있었다.
사진첩에서 초점이 흐린 당시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생산한 와인을 선물로 받으며 찍은 사진이다. 시골 할아버지 같은 살가운 표정으로 람보르기니씨가 웃고 있다. 그는 ‘미우라의 피’라고 불리는 컬리 델 트란시멘트(Colli Del Transiment)라는 레드 와인을 생산했다. 그의 와이너리는 현재 딸 파트리치아가 이끌고 있다고 한다.
이준애(여행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