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려 한 푸른 꿈에도 이끼가 낄까

입력 2013년07월19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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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김옥균 유허지 


 충남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한 김옥균 유허지는 ‘고균길’만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질 않던가. ‘고균’이 김옥균의 호임을 알았더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매진 않았을 텐데‥. ‘고균길’이라 이름 붙은 좁은 농로를 통과하자 곧 선생의 유허지는 한눈에 들어왔다. 


 ‘한말의 풍운아’, ‘비운의 선각자’ 등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김옥균의 유허지는 쓸쓸하고 무상했다. 영인면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마루에 자리한 그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하고, 돌꽃과 이끼로 얼룩진 망주석은 표정조차 잃고 무심히 서 있다. 한 때 세상을 바꿔보려 했던 그의 푸른 꿈도 이렇게 이끼 낀 채 어디선가 떠돌고 있을까.   


 그야말로 운산호묘(雲山浩渺), 구름 낀 산이 넓고 아득하다. 이 말은 김옥균이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인천항을 통해 일본에 망명할 당시 쓴 휘호로, 그의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다. 이 휘호는 김옥균이 망명 당시 승선했던 배의 선원이었던 스다 신파치 씨에게 써준 글로, 스다 씨의 증손녀인 혼다 씨가 보관해 왔다고 한다. 


 한말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고자 애썼던 김옥균은 개화당을 조직해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고종 21년(1884)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그의 꿈은 3일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일본으로 망명했던 그는 1894년 한·중·일 삼국의 제휴라는 삼화주의를 주장, 청나라의 실력자 리홍장을 만나러 상해를 방문하던 중 수구파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청나라와 수구파 세력이 빼돌린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 후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됐다. 효시된 그의 목에는 ‘모반 대역부도 죄인 옥균 당일 양화진두 능지처참’이라 써붙여 한성부 저잣거리에 내걸었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려 했던 그의 야망은 이렇듯 비참한 최후와 능지처참으로 인해 시신조차 거둘 수 없게 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알게 된 당시 일본인들이 그의 의관과 머리카락, 손톱, 발톱 등을 거둬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에 있는 외인묘지에 매장했다. 이 곳에 있는 김옥균의 무덤은 뒷날 그의 양아들 김영진(당시 아산군수)이 일본에서 수습해 와 부인 유 씨와 함께 이 곳에 안장.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후 김옥균은 갑오개혁 때 김홍집 내각에 의해 반역죄가 사면돼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일으킨 정변을 놓고 여전히 설왕설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그의 선각자적 정신과 행동은 애국심에서 발로된 구국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찾는 이 없는 쓸쓸한 유허지에 인기척이 들려온다. 고균길로 검은 차 한 대가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와 멈춰선다. 운전석에서 내린 작은 체구의 노인. 말없이 언덕을 올라와 무덤을 한 바퀴 돌더니 고균길로 내려가 철퍼덕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석상처럼 멈춘 채 움직이질 않는다. 노인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노인의 모습에서 뼈아픈 탄식의 목소리가 들렸다면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더없이 무상하고 쓸쓸하다 여겼던 유허지로 한 무리의 청년들이 들이닥친다. 주변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진다. 고였던 공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씩씩하게 언덕을 올라온 청년들은 무덤 앞에 나란히 서 한참을 읍한다. 외롭기만 한 무덤은 아니었다.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 서평택IC → 아산만방조제 → 38번 국도를 타고 아산시로 향하다가 아산온천단지로 가는 아산 교차로에서 나온 후 영인면 소재지로 향한다. 김옥균 유허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고균길로 접어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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