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들었다 놨다'했던 풍경이… 왠지 '낯설다'

입력 2013년08월02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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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정동진


 
한국 드라마사의 한 획을 그은 <모래시계>가 최근 다시 방송되면서 작품 속 배경지였던 강릉 정동진도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95년 방영 당시 숱한 화제를 몰고 왔던 <모래시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질곡의 우리 현대사를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담아낸 드라마로, "귀가시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정동진역은 드라마 속 여주인공 혜린(고현정 분)이 체포되기 전 찾아간 곳이다. 몰아치는 해풍에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기차를 기다리던 혜린의 모습과, 그녀 뒤로 펼쳐지던 금방이라도 철길을 덮칠 듯한 넘실거리던 바다 풍경이 전파를 타면서 찾는 이 없던 한적한 정동진역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뒤바뀌었다.


 이용객이 적어 폐역될 뻔한 이 작은 간이역으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허름한 역사 외 아무 것도 없던 주변에 우후죽순 카페가 생겨나고, 근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철로 옆에 서 있던, 바닷바람에 휘어진 키 작은 소나무조차 "고현정소나무"라 이름이 붙으면서 정동진역의 명물이 됐다. 그야말로 드라마 <모래시계>가 몰고 온 신드롬이었다.


 그 후 20여 년이 흐른 정동진의 모습은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소나무와 바다와 철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3중주는 변함없이 펼쳐지지만 모래시계공원과 정동진박물관이 들어서고, 선크루즈리조트의 위용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인다. 역 주변으로 자리한 크고 작은 숙박업소와 음식점들, 단체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관광버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오래 전 정동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달라진 풍경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해진다. 청춘의 날들을 "들었다 놨다"했던 그 쓸쓸하면서도 달콤했던 풍경은 사라지고 무리지은 관광객들이 만들어내는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가 낯설기만 하다.


 정동진은 서울 광화문 앞에 있는 도로원표석을 기점으로 바라봤을 때 가장 동쪽에 있는 나루터란 뜻이다. 그래서 하지 때는 한반도 제일 동쪽으로 해가 뜨는 고을이기도 하다. <모래시계>로 이 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여행마니아들 사이에는 바다와 맞붙은 정동진역의 서정적인 풍경과 일출이 입소문 나 있었다. 드라마 열풍과 함께 전국적인 명소가 된 데 이어 기네스북에까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등재되면서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적인 명소인 셈이다.

 
 그 "세계적인" 명성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려했던 것일까. 정동진에 자리한 모래시계공원에는 세계 최대의 모래시계가 있다. 1999년 강릉시와 삼성전자가 새로운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총사업비 12억8,000만 원을 들여 조성한 모래시계공원 안의 모래시계는 지름 8.06m, 폭 3.20m, 무게 40t, 모래무게 8t으로 세계 최대다. 시계 속에 있는 모래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꼭 1년이 걸린다. 그러면 다음 해 1월1일 0시에 반 바퀴 돌려 위아래를 바꿔 새롭게 시작한다.


 이런 풍경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들은 서둘러 발길을 역사쪼으로 옮긴다. 얼른 바다와 소나무와 철로가 나란히 달리는 그 풍경과 마주하고 싶어서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혜린이 쓸쓸히 걷던 그 풍경을 떠올리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무엇이 있으랴. 색색의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역 구내는 관광지다운 정비로 말끔히 단장돼 있다. 파도가 당장이라도 덮칠 듯했던 바다와 철로 사이엔 펜스가 자리 잡았고, "고현정소나무"라 불렸던 키 작은 소나무는 그 동안의 세월만큼 훌쩍 자란 달라진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했고, 그 보다 더 큰 변화는 체인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격리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동진 시비가 자리했고, 여러 조각 조형물이 곳곳에 조성됐다. 기념촬영에 바쁜 관광객들이 우르르우르르 몰려다니며 어깨를 부딪쳐오는, 왠지 낯선 정동진역에서 나그네는 울고만 싶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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